바람과 나
김산
용산에서 동인천으로 가는 급행열차였다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불콰한 중년은 기둥을 잡고 졸고 있고
짧은 치마 위에 조그만 핸드백을 올려둔 여자는 팔짱을 끼고 있고
우람한 체격의 남자는 다리를 쩍 벌리고 고개를 갸웃하고
동그란 뿔테 안경을 낀 똘망똘망한 소년은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고
지팡이를 한 손에 그러쥔 할아버지는 마스크를 썼다 벗었다 하고 있고
임산부석에 앉은 찢어진 청바지 소녀는 이어폰을 끼고 있고
여섯의 남이 여섯의 나로 보였다
그동안 살아줘서 고마워, 있어 줘서 그걸로 됐어
하마터면 일어나서 한 명 한 명 뽀뽀를 할 뻔했다
가슴이 벅차올라 울컥하는데 그들의 배경 뒤로
흰빛들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눈물이 맺혔다
동인천역 광장,
화단 옆에 앉아 지나치는 수많은 나를 봤다
한 줄 한 줄, 차마 읽기도 전에 스치는 너라는 내가
바람으로 흩어지고 또다시 불어오고 있었다
-전문(p. 140)
------------------------
* 『2021 통영문학상 수상작품집』 역대수상자 작품_에서/ 2021. 10. 15. <도서출판 경남> 펴냄
* 김산(2017년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1976년 충남 논산 출생, 2007년『시인세계』로 등단, 시집『키키』『치명』
'사화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령사 터 오백 나한/ 박영식 (0) | 2023.05.11 |
---|---|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현승 (0) | 2023.05.11 |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천양희 (0) | 2023.05.07 |
타는 목마름으로 살던 때는/ 김지하 (0) | 2023.05.06 |
가시는 듯 다시 오소서/ 김지하 (0) | 2023.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