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지정애_시.가.마가 선정한 좋은 시/ 패러디에 기대어 잠들다 : 이화은

검지 정숙자 2022. 8. 24. 02:47

 

    패러디에 기대어 잠들다

 

    이화은

 

 

  한 사흘 밤낮을 깨지 않고 푹 자봤으면

  자고 나면 이 또한 지나갔을까

  아니 석 달은 자야겠지

  삼 년은 자야겠다

  삼 년이 눈 깜빡할 사이라는데

  삼십 년은 자야겠다

  그러면 이 또한 지나갔을까

  질긴 이 또한이 아직도 서성인다면

  삼백 개의 알약을 준비하고

  그러면 잠든 채 삼백 년을 훌쩍 건너갈 수 있겠지

  그러나 그러나

  삼백 년 그 긴긴 길 위에서

  이 또한과 우연히 마주친다면

  나머지 알약을 황급히 털어 넣고 꿈속으로 도망쳐야지

  꿈속에는 잠이 지천이래잖아

  은하처럼 하늘에서 쏟아진대잖아

  아무 데나 누워 잠든 사람들로 거리엔 발 디딜 틈 없다는데

  그 틈에 끼어 나도 자야지

  나 지금 정말 잠든 거 맞지?

    -전문, 『포엠포엠』(2002-여름호)

 

  ▣ Little Magazine시가마 선정 좋은 시_지정애/ 시인

  아   잠이시여, '이 또한'을 불러들이는 잠이시여,

  늘 잠과 불화하고 있다. '자고 나면 이 또한 지나'가고 마니 고통도, 슬픔도 지나가고 없을 건데 잠들지 못한 밤은 부스럭거리고 초조하다. '꿈속에는 잠이 지천'인데 꿈은 어디서 서성이고 있을까? 그런 밤이 쌓이고 쌓이면 영면으로 옮겨 가겠지.

  불면이 불청객으로 버젓이 찾아와 책상 앞으로 호출하던 것도 옛날의 금잔디가 되었다. 잠 속에 모인 무수한 '이 또한'이 꿈으로, 한 문장으로 태어난다면, 내게 덥석 안기지 않은 잠의 머리를 쓰다듬을 날도 있을 것이다. (p.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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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ttle Magazine 『시 가꾸는 마을 』 2022-여름(35)호 <시가마 선정 좋은 시> 에서

  * 지정애/ 경북 안동 출생, 2009년『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속삭이는 바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