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낙타에게 미안해/ 이섬

검지 정숙자 2022. 7. 26. 01:32

 

    낙타에게 미안해

 

    이섬

 

 

  새벽녘, 달빛도 숨어버린 캄캄한 밤이었어

 

  쌍봉낙타의 등에 앉아서

 

  이집트의 시내산을 오르는 길이었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돌산 길,

 

  행여 떨어질세라 손이 저리도록

 

  낙타 등에 달린 2개의 봉우리를 움켜쥐었지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는 새벽녘

 

  나는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아

 

  지그재그로 이어진 가파른 돌계단을 오를 때,

 

  바르르 떨고 있는 가녀린 낙타의 다리

 

  덕지덕지 군살 돋아 갈라터진 무릎

 

  그렁그렁 눈물 가득한 눈망울, 

 

  방향을 조종하는 채찍 소리

 

  낙타의 등에 앉아 조금 더 편하게 산을 오르려는

 

  무심한 나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순례의 길이었어

 

  생각할수록 미안한 순례의 길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지워지지 않는

 

  실루엣

 

  낙타에게 미안하다

     -전문(p.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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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유 제2집 『날마다 피어나는 나팔꽃 아침』에서/ 2022. 5. 9. <지혜> 펴냄

  * 이섬/ 1995년 ⟪국민일보⟫로 등단, 대표 작품집『향기 나는 소리』, 시집『누군가 나를 연다』『초록빛 입맞춤』『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황촉규 우리다』『고요의 맥을 짚다』『낙타에게 미안해』, 시선집『초록, 향기나는 소리』, 에세이집『외갓집편지』『보통사람들의 진수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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