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4 4

안전은 쓰레기 같은 것*/ 정채원

안전은 쓰레기 같은 것*    정채원    오래전 부서진 누군가가  손짓하며 부르는 듯   4천 미터 해저로 들어간 거다  23만 달러를 내고 잠수정을 타고   심해 관광을 떠날 때  사인을 했다, 쓰레기는 두고 간다고  죽어도, 불구가 돼도, 책임 물을 일 없다고   억만장자 전 재산을 세상에 남겨 두고  몸만 떠난 거다   한동안 잠수를 타다  영영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다 아는 척   언제고 동침할 수 있는 죽음이  두근두근 떠다니는  황홀한 심해心海에는   더 이상 부서질 일 없는 난파선이 상주하고 있다     -전문(p. 67)    * 미국 오션게이트 익스페디션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스톡턴 러시의 말. 그가 조종했던 잠수정 '타이탄(난파선..

풀등의 노래/ 이명훈

풀등의 노래     이명훈    열두 살 사내가 집 나간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정선 장터에서 미쳐 춤추는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으신지요.   그 말을 가슴 뒤에 세워 놓은 탓에 국졸로 술을 마셔도, 늘 풀매미 같은 슬픔, 지금도 보내지 못하고 있지요. 막노동 끝에 술에 취해 빙판길에 헛발을 디뎌 생과 사의 균형을 헤맬 때도, 강아지풀 무리처럼 흔들리며 웃을 때는   저승사자 앞에서도 실없이 웃었을 광철.  새가 밤으로 들어간 사이 가등 아래 떨어져 누운 매미를 손으로 잡았을 때, 매미의 울음소리가 조장을 끝내는 라마교의 경전 소리처럼 들리더군요.  그 불편한 경소리를 붙잡고 밤 깊숙이 서 있는 동안 물이 물을 끌고 흘러가는 것도 봤지요.   이 삼복더위 속에서도..

초가지붕, 화양연화 외 1편/ 이혜선

초가지붕, 화양연화 외 1편      이혜선    마당 가득 샛노란 이엉 뭉치가 쌓인 날, 동짓달 초하루 바람 자는 날 남늪아재 덕암양반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 키 큰 옹칠이 아재가 아래에서 두루마리 이엉뭉치를 올려주면 위에서 받아 추녀의 끝에서부터 두루루 펼쳐 지붕 전체를 꼭 안아주었다. 빗자루로 스윽스윽 쓸어서 볏짚이 골고루 퍼지면 새끼줄로 동여매어 꼭꼭 눌러주었다. 정침과 사랑채를 사방 돌아가며 추녀 끝에 삐죽 내민 볏짚을 가지런히 면도해주면 짧은 동짓달 해가 어느덧 똥맷등 너머로 꼴깍 숨었다. 머릿수건 벗어 툭툭 털어 땀을 닦고 횃불 아래 둘러앉은 저녁상에 막걸리 덕담이 구수하다   지금도 바람맞이 산고개 넘다가 되돌아보는 그  높은 음자리표    -전문(p. 106)      ---..

내 어린 왕자에게 1/ 이혜선

내 어린 왕자에게 1      이혜선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  밤새워 내린 가을비 속속들이 울음 우는 들녘  푸르게 푸르게 젖어드는 이  내 그대 가슴에 들게 하여 나를 적시는 이  나보다 더 내 속을 잘 아시는 이   불을 내면 불로 끄다, 물에 타오른다     -전문-   서정을 말하다> 부분: 시는, 일상의 굴레에 매여, 또는 그날이 그날 같은 매너리즘에 빠져 기계적으로 걸어가는 우리 삶을 일깨우고 쓰다듬어 꿈을 꾸게 하고, 묻혀 버린 삶의 핵심에 가닿게 만들어 준다.  시는, 그리움을 더 그립게 하고, 사랑을 더 사랑하게 하고, 슬픔과 아픔의 껍질을 깨어 더 슬프고 더 아프게 하여 치유에 다가가게 한다. 잠든 영혼을 깨워서 삶의 본질을 꿰뚫는 심안心眼과 혜안慧眼을 가지게 한다. 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