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먹구름의 앵무새/ 박판식

검지 정숙자 2024. 10. 7. 01:47

 

    먹구름의 앵무새

 

     박판식

 

 

  그래봤자 파산 없는 인생이 무엇을 알까요

  집도 쓸려가고 과수원도 진흙탕이 되고 농기계도 없어진 텅 빈 마당에

  경북 김천 사람이 서 있네요

 

  살아남은 사람은 각자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내가 죽고 싶을 때 죽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자연은 무자비하고 순수한 어린 아이입니다

 

  간선버스를 놓치고 전철을 놓치고 손님을 놓치고

  오늘따라 접시도 깨지고 분식점 아주머니는

  가게를 접고 석 달은 그냥 신나게 놀겠다고 말합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즐거운 거짓말입니다

 

  혼자 머리를 감고 빵집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고 서류를 몇 장 넘겨보다가

  사무원처럼 빈 몸으로 퇴근하는 행복을 맛보고 싶습니다

  비가, 나무 없는 나무의 열매들처럼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다 담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덧없음보다는 불행이 낫지 않을까요

 

  나는 먹구름의 앵무새

    -전문(p. 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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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여는세상』 2024-봄(89호)호 <신작> 에서

  * 박판식/ 2001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밤의 피치카토』『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