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데이트 외 1편
김선영
50년대 가을날 공덕동 301번지, 미당 선생 댁을
우리들이 방문했을 때 그분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노란 국화향기에 젖어 계셨다.
글 쓰시는 방 벽체엔 액자도 없이
천경자 화백의 화사도가 한 점 수수하게 붙어 있었다.
벽지 속 무늬처럼 오색 물감의 꽃뱀들이 수풀 속에 엉켜
벼랑의 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 쓸 때
무리 중 하나가 물감을 벽에 묻히며 기어 내려와
선생의 책갈피 사이로 스며들었다.
마당의 노란 국화밭에는 하늘에서 삽으로 퍼내리는 진한 금햇살로 광채를
이루고 있었고,
'찬란하구먼'
가난한 시인은 부러진 안경테 대용으로 삼은 무명실의 귀걸개를 연신 치켜
올리며 국화의 아름다움도 함께 치켜올리셨다.
나는 시인과 국화와의 데이트를 흠집 내지 않으려
아까 본 정경을 뒤로 미루기로 하였다.
-전문(p.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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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나무
가지에 앉은 뻐꾸기 울음
연두로 칠해 보자
곧추 선 나무의 허리
나무의 연두를
흔들어 보자
꽃잎 몇 떨어진다
나무 한 그루
달을 따라 간다
번개가 쳐도
놀라지 않는
그림 속 나무
평생 잎이 지지 않을
푸른 나뭇가지엔
평생 날아가지 않을
뻐꾸기 한 마리
소리 없이 노래하고 있다
그림 속 나무엔
아무도
쉬어가지 않는다
-전문(p.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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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그림 속 나무』에서/ 2024. 9. 13. <서정시학> 펴냄
* 김선영/ 1938년 개성 출생, 1957년 1회에서 1962년 3회 추천까지 미당 서정주 선생 추천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풀꽃왕관』『달을 배웅하며』『작파하다』『쓸쓸한 것들을 향하여』『사모곡』『라일락 나무에 사시는 하느님』『밤에 쓴 말』『환상의 문지기』『풀꽃제사』『허무의 신발가게』『사가』등, 시선집『그리움의 식물성』『누구네 이중섭 그림』『달빛 해일』『달을 빚는 남자』, 수필집『순결한 예술가의 초상』『사랑은 마주 울리는 메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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