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단서 김영미 몇 줄 잎들이 내 의식의 지퍼를 열고서 뭉텅뭉텅 빠져나오는 듯한 오후 바람이 분다 창은 이럴 때 늘 벽이 된다 커피는 내가 새벽꿈들을 다 몰아낸 뒤에나 끓을 것이다 기다림이 왜 오랫동안 거실에서 풍토병처럼 동거하는지 커피를 끓이다 보면 알게 된다 어제도 누군가의 태양이 서쪽으로 졌다 오랜 병고 끝에 있는 아버지와 며칠간 통화가 부재 신호로 바뀐 고향 친구 부음으로 느닷없는 날에도 서녘 하늘은 몽환처럼 붉다 허공 한편에 위태롭게 매달렸던 이별의 언어들은 쉽사리 밟히지 않을 거실 속을 헤맨다 맞잡은 손을 놓아야 할 이별의 영토를 넘겨다보는 일은 얼마나 눈물겨운 아름다움인지 나는 창 밖 풍경들이 나무에게 가려질 때마다 바빠지기 시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