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4 4

아마도, 아몬드/ 최형심

아마도, 아몬드     최형심    아몬드 나무 아래 아무도 없는데 아몬드꽃 사이로 아무도 모르는 이름을 놓아주네. 수도원과 오래된 무덤 사이를 연분홍 우산을 쓰고 걸어도 좋은 시절,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았네. 본 적 없는 아몬드꽃을 닮은 케이크를 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이와 내가 모르는 유월의 오후를 지나 점점 단단해질 사람을 생각하네. 아몬드 나무 아래 아직 아몬드 없어, 지난밤 푸른 손톱에 내린 별들을 헤아리며 영원한 타인들의 연대기를 꿈꾸네. 그리움보다 긴 머리카락을 만지며 물별 뜨는 은하로 흘러들고 싶은 내 곁에서 아몬드 나무의 눈부신 침묵이 피고 있는데······   (나무로 만든 마음과 고요는 서로에게 잘 어울리네.)   저물녘 어느 해변에서 나비목의 사람들과 멀로 추운 곳에서..

유성호_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전문)/ 국수 : 백석

국수     백석 (1912-1996, 84세)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넢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든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군락(群落)/ 박해람

군락群落      박해람    대부분 열매들은 동그랗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멀리 굴러가라는 뜻이다. 동그란 형태의 도움을 받든, 그도 아니면 운 좋아 살짝 경사진 내리막의 도움을 받는 최대한으로 슬하에서 벗어난 그 한계점에서 모여 사는 군락지들, 나무들, 식물들의 마을인 군락지를 만날 때마다 모두 타고난 형태와 행태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는 천형들이 있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언젠가 제주도에서만 자생하는 문주란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문주란은 썰물 때에만 그 열매를 떨군다고 한다. 섬을 떠나 더 넓고 먼 뭍으로 가라는 뜻이 담겨 있겠지만 군락의 가장 큰 요건 중 하나는 매개媒介와 날씨가 아닐까 한다. 인간과 달리 식물은 날씨가 모국이고 고향일 것 같다.   모이고 흩어지는 일에는 다양한 ..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조금쯤 모자라거나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면  내일 다시 하거나 내일  다시 고쳐서 하면 된다  조그마한 성공도 성공이다  그만큼에서 그치거나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고  작은 성공을 슬퍼하거나  그것을 빌미 삼아 스스로를 나무라거나  힘들게 하지 말자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많은 일들과 만났고  견딜 수 없는 일들까지 견뎠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오히려 칭찬해주고  보듬어 껴안아 줄 일이다  오늘을 믿고 기대한 것처럼  내일을 또 믿고 기대해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너, 너무도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전문(p.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