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될 수 있는 우리▼
이담하
그믐달과 초승달 안에서 집합
혼자가 아니라 우리,
남인데 우리, 우리 할 때마다
우리 사이에 땀이 흐르는 관계
남이라서 뜨거워지죠
친애하는 애무는 무엇이든 곡진합니다
우리가 될 수 있는 남, 그래서
남이 될 수 있는 우리는 우리가 되기 위해 남을 사랑하죠
모를수록 뜨거워질 확률은 매우 높죠
남이면서 남이 아닌 우리
우리이면서 우리가 아닌 남
서로의 반대편에서
반쪽이라는 관계 설정으로 잉태와 출산과 유혈이 흥건하죠
우리의 남, 남과 우리
주름이 생길 수도, 무음으로 깨질 수도
태평양이 들어설 수 있어서 아주 좋아요
남이라서 가까워지는 남의 남
우리라서 멀어지는 우리의 우리
나는 당시에 남이고
당신은 나의 남이라서 우리
그믐달과 초승달로 뜨는 공집합이죠
-전문-
▶신록의 밀어密語와 범람하는 폐허들(발췌)_이철주/ 문학평론가
당신과 나 사이 까마득한 심연을 형상화하고 있는 위 시 역시, 신록의 뜨거운 열기에 깃들어 있는 위독한 결핍과 결여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우리"와 "남"이라는 관계의 극단이야말로 실은 서로가 서로를 되비추며 더 긴밀히 서로의 중심을 끌어당기고 있었음을 성찰하고 있는 위 시는 "우리"와 "남" 사이 관념적인 이분법으로 인해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숱한 사랑과 좌절, 열망과 치욕의 뒤엉킴을, 환멸과 오욕으로 점철된 숱한 "잉태와 출산과 유혈"의 흔적들을 고통스레 다시 발굴해 낸다. 이쯤 되면 한 번쯤 무너져 내릴 만도 하지만 이담하 시의 화자는 이번에도 이 치명적인 상처로서의 본성과 그 운명성을 경쾌하게 끌어안는 쪽을 선택한다. 당신과 나, "우리"와 "남" 사이에 가로놓인 이 아득한 심연은 "주름이 생길 수도, 무음으로 깨질 수도, 태평양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유한성과 취약성 덕분에 비로소 더 "뜨거워질" 수 있다는 존재의 가능성을, 미약하나마 서로에게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확률"을 확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기발랄한 명랑함으로 위장된 신록의 열기와 그 열기의 조건으로서 자리하고 있는 결핍과 갈망의 무게가 이담하 시의 목소리를 한층 더 결연하고 탄탄하게 만든다. 꽃이 피고 생명의 더운 열기가 온 삶을 끌어안아도 세상의 신록은 모두 울음이고 비명이며 상처이고 폐허이다. 남칠 듯 범람해 오는 신록의 밀어들엔 모두 한없이 깊고 단단한 허기와 짙은 갈망의 피냄새가 선연히 깃들어 있다. 신록의 열기가 가시고 견뎌야 할 부재의 시간이 찾아오면 폐허는 더 깊이, 더 소슬히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이담하의 시는 이 부재의 시간을 캄캄히 더듬으며 폐허의 잔해더미로부터 열망하는 눈빛과 뒷걸음 치는 자세와 상실에 사로잡힌 거대한 허기를 읽어내곤 이를 누구도 함부로 해독해선 안 될 신록의 상형문자 속에 깊숙이 밀봉해 넣어둔다. (p. 시 228-229/ 론 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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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4-5월(413)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신작시/ 작품론> 에서
* 이담하/ 2011 『시사사』로 등단, 시집『다음 달부터 웃을 수있어요』
* 이철주/ 문학평론가, 2018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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