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은정_가시가 박힌 채로 걸어 다니는 춤(발췌)/ 악력 : 박은정

검지 정숙자 2024. 8. 1. 18:34

 

    악력

 

    박은정

 

 

  꽃병의 물이 썩어간다 나는 누웠다 창밖에선 날카로운 감탄사들이 들려온다 오토바이 시동 소리가 퍼지고 개들은 더위 속에서 조금씩 미쳐간다 눈을 감고 생각한다 이 폭염 아래서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일까 노래는 한 곡 반복된다 주먹을 쥐면 모든 것들이 빠져나간다, 유년의 침울한 내가 옆에 눕는다 넌 변한 게 없구나 내 오른뺨을 찰싹 때리는 소리, 나의 슬픔은 맞아도 싸다 눈물이 귓속으로 떨어지는 동안 이 방은 안전한 어둠이다 인중에 땀이 맺힌다 눈물이 땀과 뒤섞인다 이 물질은 이제 무엇으로 연동되나 나는 걷고 있었다 부유하고 있었다 어떤 습관과 함께 나는 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희미하게 방 안을 맴도는 기억들이 있다 나는 새장에 갇힌 새를 보며 세계의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등을 돌리면 엄마가 걸레로 바닥을 훔치고 있다 엄마는 반복되고 있었다 안방에도, 거실에도, 부엌에서도, 엄마, 머지않아 우린 다 사라질 거야 오후가 저물도록 새장의 새는 노래하지 않는다 나는 어둔 거실에 앉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노래도 아니었고 한숨도 아닌 어떤 낯섦 같은 것이었는데, 그 낯섦 속에는 막 쓰기 시작한 잔혹사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떤 비유도 어울리지 않는, 그저 멈춤, 다가가기 전의 망설임,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전의 불안감, 다시 주먹을 쥔다 아무것도 만질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불가능한 기억, 손 안의 새가 날아간다 손 안의 야생이 달아난다 너는 너무 감상적이야 유년의 내가 왼뺨을 때렸다 그것이 어떤 문장인지 나는 모른다 그저 네네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 이 이상하고 서글픈 일이 나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누웠다 그때 노래 한 구절이 들려왔다 끝도 없이 목적도 없이 반복되던 노랫말이 들렸다 주먹을 다시 펴 본다 짓이겨진 새가 노래한다 문드러진 꽃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전문, (시집 『밤과 꿈의 뉘앙스』, 2022, 민음사) 

 

  ♣ 가시가 박힌 채로 걸어 다니는 춤(발췌)_박은정/ 시인

  시는 내게 유일한 도피처였다. 막막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주위를 둘러보아도 내가 달아날 곳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작은 짐승이 천적이 없는 곳에서 마음 놓고 깊은 잠에 들고 싶은 마음으로 문장들을 쌓아 올렸다. 때로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무너지는 문장에 눈이 쓰라렸지만, 아직까지도 내 문장만큼 나를 다독이고 편안한 공간을 주는 곳은 없다. 이것은 이 세계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절망 또는 분노의 다른 이야기일 수 있다. 내 시 속에서 나는 자주 변형되고 반복되면서 스스로를 지워 나간다. 그리고 다른 인물들 역시 꿈도 현실도 아닌 제3의 시공간 속에서 세계의 슬픔에 도리 없이 고개 젓다가 한 편의 이야기를 입고 나와 새로운 현실 세계를 엮어 나간다. 나는 이런 시를 쓴다. 두세 스푼의 현실과 다량의 환시 사이에서 고갈 데 없이 두리번거리는 화자가 또 다른 나의 모습이자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어쩌면 그래서 내 시는 자주 물결에 휩싸여 형태를 잃어 가는 모양새이거나 두 발이 닿지 않아 더딘 걸음으로 허공을 보는 마음으로 쓰이는지도 모르겠다. 시 속에서 말하는 나는, 바라보는 세계는, 그래서 좀 더 현실보다 비현실적이고 비현실보다 현실적이다. (p. 시 298-299/ 론 29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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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4-1월(409)호 <시간성_ 나의 시를 말한다_14> 에서 

  * 박은정/ 시인, 2011년『시인세계』로 등단, 시집『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밤과 꿈의 뉘앙스』『아사코의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