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동억_ 단언과 반문(발췌)/ 나뭇잎 위 : 이경림

검지 정숙자 2019. 10. 13. 17:25

 

 

    나뭇잎 위

 

    이경림

 

 

  나는 벌레 먹은 한 넓적한 이파리 위에 산다 창밖에는 온갖 이파리들 위에 위태롭게 얹혀 있는 길들이 보인다 실바람에도 유리창이 덜컹거리는 집들은 알 수 없는 균형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그런대로 나뭇잎 위의 집 속에서의 삶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그 집 속에서 그들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출근을 한다 아침이면 잎맥을 따라 출근하는 사람들로 나뭇잎은 붐빈다 해는 매일 벌레 먹은 구멍에서 솟아올라 그 구멍으로 진다 바람은 이파리들 사이로 강물처럼 흐른다 바람 속에는 어떤 차고 맑은 것들이 산다 그 속에는 바람 속에만 사는 바람고기들이 있다 비바람 치는 날은 바람의 강을 거슬러 오르는 그것들의 지느러미 소리가 숲속 가득 요동친다 그런 날 나는 온종일 흔들리는 이파리 위의 집에서 정수리 위로 옆구리로 구들장 아래로 흐르는 그것들의 소리를 듣는다 세상이 온통 소리로 출렁거린다 

 

  매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나뭇잎 뒤로 사라지고 벌레 구멍 속에서 태어난다 태어나자마자 그들은 위태로운 나뭇잎 위를 여행하기 시작한다

   -전문- 

 

  * 본인의 산문집에 수록되었던 글을 시로 재구성하였음

 

 

  ▶ 단언과 반문/ -이경림  시인의 신작시(발췌)_ 박동억/ 문학평론가

  아이의 상처 입은 몸 하나 떠받치기 힘든 한 뼘의 세계, 그렇다면 이 세상은 "벌레 먹은 한 넓적한 이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에게 세계는 좁다. 적어도 「나뭇잎 위」에서, 세계는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출근을"하는 일상적 시간으로 인해 좁다. 일상은 시간의 동어반복이다. 같은 행위와 같은 감정을 반복하게끔 하는 '나뭇잎 위의 집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좁게 쓰는데 만족한다. 그렇지만 대개 인간은 평온과 즐거움에 그런대로 만족하며 산다. 그런데 시인의 상상력은 어째서 그 일상에 '구멍'을 발견하는 것일까. 일상을 벗어나 날아다니는 '바람고기'를 보려는 의지를 품게 되는 것일까./ 이경림 시인뿐 아니라 모든 시인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의 공백을 본다. 시인은 이 세계의 결여된 부분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아직 현실에는 없는 현실이다. 그렇게 발견되는 공백이란 시인이 욕망하는 진정한 현실이기도 하다. 과학자는 물질 속에서 공백을 실현하지만, 시인은 인간의 마음에서 공백을 실현한다. 이경림 시인 역시 세계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로서 "어떤 차고 맑은 것들"을 발견한다. '추락하는 별'의 반대로 솟아오르는 '바람고기'를 몽상한다. 오직 바람 속에서만 사는 순간을 몽상한다.(p.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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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동네2019-10월호 <특집/ 신작시/ 작품론> 에서

  * 이경림/ 경북 문경 출생, 1989년『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토씨 찾기』『급! 고독』등, 시론집『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엽편소설집『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산문집『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등

  * 박동억/ 2016년 《중앙일보》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