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우크라이나 외 1편/ 박민서

검지 정숙자 2024. 4. 20. 02:36

 

    우크라이나 외 1편

 

     박민서

 

 

  북반구의 찬 기류 속으로 수많은 길들이 생기고 있다

 

  목적지 없는 발자국들은 양손의 짐보다 몸이 더 무겁고 불꽃으로 날아온 공중좌표 따라 숨소리들이 힘없이 부서져 내린다

 

  곡식의 저장창고를 비워가는 사람들

  빈 밭의 낙곡들은 입을 길게 내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따라가고 싶을 것이다

 

  살기 위해 떠나는 새들은 발자국이 없다

  씨앗보다 총알이 더 많이 박힌 땅

  입을 굳게 다문 곡식들은 새날의 종자가 될 수 있을까

 

  깃털이 큰 새들은 평온한 땅을 찾아갈 것이고

  깃털이 작은 새는 봄날을 기다릴 것이다

 

  싸우는 자와 떠나는 자의 슬픔의 각은 같다

  지상에서 한꺼번에 치른 장례들

 

  추위가 몰아치면 달의 그늘에서 죽은 새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따듯한 묘지들 먼 북반구 쪽의 하늘은 잿빛

  날개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는 아픈 식탁만 가득하다

 

  오늘 우리의 저녁이 저들의 폐허 위에서 피어나는 것이라면

 

  지상의 온기를 찾아 날아가는 새들은 어디쯤에서 쉬고 있을까

      -전문(p.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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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간개장 동물원

 

 

  밤하늘엔 야생동물들이 갇혀 있다

  다시는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을 것처럼 높이 걸려 있다

  먹이사슬이 없어 푸른 불꽃을 먹고

  처녀 사육사가 별의 촛불을 하나씩 켜면

  동물원 야간개장을 시작한다

 

  낮에는 잠을 자다가

  밤에만 나타나는 동물들

 

  계절마다 우리 밖으로 튀어나온 숲

  동물들이 나란히 거리 한복판을 우르르 지나간다

  가로수에서 별의 열매를 따 먹는다

  그 열매에서 사자와 독수리, 황소와 전갈을 낳는다

  

  양 떼를 몰고 가는 유목인이 치는 별점

  대륙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별자리들의 틈을 메운다

 

  동물을 숭배하는 습관이 있었다

  얼굴을 핥거나 밭을 갈지는 않지만 좌표 없는 우리와

  달이 열두 개 떠 있는 별자리에서

  동물 울음소리가 들린다

  지상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누구도 키우지 않는 동물 한 마리

  망원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별 하나에 끈을 묶고 사는 동물

  서로 흩어져서 환하게 밝아오면

  처녀 사육사가 듣는 사방 문 닫는 소리

  야간개장 자유이용권을 목에 걸고

  활활 타오르며 늙어가는 사파리에 간다

      -전문(p.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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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시집 『야간개장 동물원』에서/ 2024. 4. 15. <달을 쏘다> 펴냄 

 * 박민서/ 2019년 『시산맥』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