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파도바니 해변에서/ 지관순

검지 정숙자 2024. 10. 27. 02:26

 

    파도바니 해변에서

 

     지관순

 

 

  이윽고 조명이 어두워지고 홀 중앙에 그녀가 쏟아졌네. 공중에 뿌린 색종이처럼 그녀가 조각조각 내려앉았네. 몸과 숨과 시간을 차례로 이어가며. 우리는 그녀의 춤에 빠져들었네. 실내가 그녀의 궤적으로 가득 차올랐네. 없음과 있음을 골고루 비추면서. 향기로운 응시가 주변을 물들였네. 번져갔네. 그녀가 팔을 뻗어 공중의 현을 끊었네. 잘려 나간 현이 음악을 뱉었네. 그녀의 몸에서 시간이 번뜩였네. 모든 가락이 술렁거렸네. 망각의 질료들이 끌려 나왔네. 그녀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네. 뒤섞이는 기억들. 회귀하는 호흡들. 홀 중앙에 그녀가 벗어놓은 춤이 남았네. 우리는 다시 춤에 빠져들었네. 그림자가 아니었냐고. 몸이 없는 춤이 왜 끝나지 않느냐고. 심문하듯이. 불은 꺼지고 사람들은 사라지고 담뱃불만 타올랐네.

    -전문- 

 

  해설> 한 문장: 말라르메를 빌리자면 시는 춤이고 산문은 보행이다. A지점에서 출발해 B지점으로의 도달이라는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보행처럼 산문은 이해라는 종착점에 반드시 다다라야 한다. 하지만 춤에는 목적이 없다. 춤은 행위라기보다 존재의 내부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어떤 힘에 의해 자연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이다. 춤은 춤 그 자체가 수단이자 목적일 뿐 어떠한 의도가 없다. 그렇기에 도덕이나 정치 같은 의식이 되지도 않는다. 의식이 되지 않는 춤은 몸짓 그 자체의 감각으로만 생동할 뿐이다. 따라서 보행과 춤에 빗대어 산문은 이해의 세계이고 시는 감각의 세계라 할 수 있다. "파도바니 해변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는 이렇게 묻고 있다. "이해되고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감각되어 남을 것인가"라고. 홀 중앙에 쏟아진 채 "몸과 숨과 시간을 차례로 이어가며" "없음과 있음을 골고루 비추"다가 마침내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무용수는 곧 시인의 메타포가 아닌가. 시는 시간이라는 유한한 형식 속에서 세계의 모든 몸(존재)과 그것들의 숨(본질)을 재현하는 행위이며 때로는 몸 없는 것에게 몸을, 숨 잃은 것에게 숨을 되찾아줌으로써 이미 흘러간 시간 가운데 소멸하거나 잊힌 존재들을 복원하는 미학적 부활 제의이기도 하다. (p. 시 79/  106-107) <이병철/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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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시집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에서/ 2024. 10. 19. <달을 쏘다> 펴냄

 * 지관순/ 2015년 계간 『시산맥』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