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원주에서 시를 쓰는 노숙인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박잎
* 언젠가 원주에서 시를 쓰는 노숙인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외로웠다는 그의 말을 이해한다고 했을 때 길거리 시인은 말했다. "끝까지 함께 하지 않을 거라면, 책임지지 않을 거라면 함부로 끄떡이지 말라"고. "잘해주지 말라"고. 이 대목에서 자꾸 그 말을 곱씹어 보게 된다. 말리나와 '나'의 대화엔 폭력의 숨은 얼굴이 예리하게 패어져 있다. (p. 21)
* 그는 거리와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단 한 닢의 동전으로 모든 사교를 집중시킨다. 밑 모를 보르헤스의 박학다식함에 손이 떨렸다. 저승길 노잣돈. 시체의 입에서 꺼낸 카론의 은화, 황제가 그를 장님으로 만들어 늘그막에 길거리에서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비잔틴제국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은화, 유다의 은전 서른 닢.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창녀 라이스의 드라크마 은화. 『천일야화』 속 마법사의 반짝이는 동전들. 『율리시즈』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의 은화. 자신의 얼굴이 찍혀 그만 신분이 탄로 난 루이 16세의 금화. (p. 36-37)
* 막다른 골목에 쫓기듯, 모든 책을 갖다 버린 밤이 있었다.
'다시는 글을 읽지 않으리라'
짙은 경멸의 밤이 있었다. 눈물의 밤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는 다시 책을 붙들고 있는가.
스산한 장터 한 모퉁이에서 보르헤스를 읽고 있는가.
내게 책은 마약도, 행복도 아니었음을···. (p. 38)
* 쉼 없이 메밀전을 뒤집는 할머니는 이욱꽃처럼 웃고 있었다. (p. 42)
* 제천 세명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춘천 집에 가는 중간 경유지 오랜 원주역 근처. 헐하고 비좁은 가건물 사무실에서 내 생의 사십 대는 흘러갔다. (p. 86)
* 비 개인 후, 햇살을 맏고 있는 적양파 빛깔이 매혹적이었다. 삶은 비트 물빛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자줏빛 색채에 홀려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물전에는 흐물흐물한 물곰과 문어, 이면수, 청어, 작은 오징어들이 가득했다. 이면수만 빼놓고는 모두 아야진 바다에서 잡아 온 것이라 했다. (p.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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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집 『툰드라백조 깃털을 아세요?』 2024. 9. 5. <푸른사상> 펴냄
* 박잎/ 2017년『월간 시』로 등단, 시집『꿈, 흰말』『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산문집 『새에 이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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