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171

연차휴가/ 유현아

연차휴가         되어진다고 믿는 것들      유현아    우리는 이렇게 살지 말자, 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그럼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지, 라고 주장하는 사람   앞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야근 뒤의 사람들은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떠밀려 가는 구름처럼  하루의 하루를 비워 둔 채로 산다고 말하지   (아버지는 사장을 꿈꿨다)   이 세상이 아름답게 되어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오후 네 시의 따분함처럼 적막을 기다리고  어깨와 어깨가 부딪히는 시간은  금방 사라지게 되어질 거라고  상자 안에 들어가서 군데군데 빈말을 뿌려 놓는다    (아버지는 망했다)   야근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제보다 많은  이유를 알고 싶지 않다  봄이 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겨울 코트를 ..

길을 찾아가는 바다/ 김차영

길을 찾아가는 바다      김차영    실개천에 태어나  강을 지나 바다로 나가 보았다   섬으로 가는 길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심해의 터널   바다가 환해질수록 쌓이는 어둠,   투잡, 쓰리잡을 해도 멀어지는 섬  성장하는 물고기 포기부터 배워  삼포, 오포, 칠포 세대로 이어지다  다포 세대가 되어가는 요지경 바닷속   그 속에서  남이 아닌 내가 되어  하찮은 조개껍질을 모으며  나만의 바닷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전문(p. 49) ---------------*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6. 5.펴냄  * 김차영/ 2021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미이라의 숲』

정체전선/ 류성훈

정체전선     류성훈    아버지가 심은 호박들이 가뭄에 모조리 죽은 다음 장마가 시작된다 나는 당신 대신 화를 냈고 당신은 호박 대신 내게 화를 냈다 뭐든 때를 맞추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구청에서 무수히 심었던 들꽃이 중장비에 다 엎어지는 공원에서 이럴 거면 왜 심었냐고 행인들이 허공에 따졌다 나는 허공에게 욕을 먹었다  잡초만 뽑다 벌써 무릎이 아프고 완전군장으로 산 몇 봉우리를 넘어 다니던 관절은 언제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아무도 아무에게도 안부를 묻지 않던 그때부터 우리는 잡초만 뽑았다 작년에도 올해도 소나무 탁상에 생긴 새 구멍에서 톱밥이 다시 쏟아져 나왔고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자부했다  호박잎보다 더 큰 토란잎보다 더 큰 해바라기 잎이 지나가던 볼살을 긁으면 피부보다 따가운 태양이 도시..

정한아_두더지 언덕으로 산 만들기(발췌)/ 브라네 모제티치 詩 : 김목인 譯

내가 지켜보는 동안 개는 들판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브라네 모제티치/ 김목인 譯    내가 지켜보는 동안 개는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이따금 킁킁대고는 다시 달린다. 원을 그리며 가서. 주로 두더지 언덕들 주위에서 냄새를 맡더니. 곧장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나는 내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에 산만해진다. 곧 갈게요. 뭐하고 계세요? 저명한 여성 시인이 묻는다. 독서 중인가요? 집필 중? 공원이 아마 멋지겠죠. 아뇨, 아뇨, 나는 당황한다. 두더지 언덕들을 보고 있어요······ 저의 개가 그 속에 코를 들이밀어서요. 오, 정말요? 전 작업 중이실 거라 생각했어요. 알겠어요, 끝나면 전화할게요. 개는 이제 가장 큰 언덕부터 시작해 킁킁거리며 맹렬히 땅을 판다. 나는 총명한 시를 쓰기에는 너무..

외국시 2024.07.20

생은 무거워/ 이영춘

생은 무거워       공동묘지 앞을 지나며        이영춘    생들이 흙속에 누워 있다 피안의 언덕 그 무덤 속에  무덤 속에서 저마다 알 수 없는 방언을 쏟아낸다  '생은 무거워, 무거워' 중얼거리는 소리 바람을 타고 건너온다  오백 년 전 세世, 사라진 내가 안개로 피어올라 무덤을 쓰다듬는다  간헐적인 숨결처럼, 파리한 눈물처럼 무덤들이 하얗게 흔들린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와 같은 박제들이  박새 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허공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날개  알약을 삼킨 생, 세상을 등진 생, 강물에 뛰어든 생,  빗물로 흐느낀다  박제 속에서 박제를 해부하면서  생이 무거워, 너무 무거워, 가쁜 숨 몰아쉬면서  흙무덤 속으로 간다  그 무덤 위로 스러지는 구름 한 점      -전문(p. 2..

첫닭/ 박만진

첫닭     박만진    한가윗날 보지 못한  보름달을   양력 시월  새벽 일찍 보네   저 먼 첫닭,   얼마나 목을 길게 빼면  울음 또한 저리 길까   이웃 일손들의 새벽잠을  서둘러 깨우려 하나   저 먼 첫닭,   얼마나 목을 곱게 빼면  울음 또한 저리 고울까   그래, 사람아!   맨 처음 우는 닭이  첫닭이 아니라   맨 처음 듣는 소리가  첫닭이네   -전문(p. 200-201)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박만진/ 1987년『심상』으로 등단, 시집『오이가 예쁘다』『붉은 삼각형』『바닷물고기 나라』『단풍잎 우표』등 10권, 시선집 『꿈꾸는 날개』등 3권

탑/ 박금성

탑         원원사지 동 삼층석탑     박금성    그는, 바람과 구름이었으나  소원의 흔적   오로지, 하나의 소원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을 향하여  쩡쩡, 땡볕을 가르며  오르는 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층층이 쌓이는 셀 수 없는 갈등과  선명해지는 사랑들  그럴수록 굳게 다듬어지는 불퇴전의 결연   그는 구름처럼 지워지고  바람처럼 잊혔어도  운명이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눈과 손이 멈추어야 할 곳에서  탑의 수연에 마음을 가두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의 소원이  더 높이 오를 듯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데   무명에 탑신의 옥개가 떨어져 나가고  벽력에 옥신이 흔들려도  오르고 오를 듯 원력을 다시 세우는데   그래, 활화산이 탑을 덮친들  그의 소원이 끊기겠느냐  미래가 다하여 세상이 멸..

봄밤/ 함태숙

봄밤     함태숙    이 거대한 짐승을 끄고 돌멩이 하나에 눈동자를 묻는 것을 보았다  영원에 필적하는 것들이 하나의 우연과 하나의 개별성에 의탁해 오는 밤을   별과 돌의 공명  내포하기 위하여 분열한 것들   지금 오는 것은 돌아오는 것이다  자기를 애도하기 위하여  빛은  작은 돌처럼 꾸르륵 꾸르륵 소리를 내며  지워진 멧비둘기 식도 안에서 피어난다   아난다여, 이제 나의 입은 어느 곳에 묻을 것인가   불타는 심장으로부터 분리된 첫 번째  환각을  사라지는 얼굴에 드리우고 드리우고      -전문(p. 189)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함태숙/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새들은 창천에서 죽다』『그대는 한 사람의 인류』『토성에서 생각..

아무도 없는 몸/ 정병근

아무도  없는 몸      정병근    혼자는 언제든 상하기 쉬운 자세로  뒤통수에 깍지를 끼거나 다리를 턴다  발톱이 자라고 털이 우거진다   비밀 하나를 공유할 때  우리는 겨우 신뢰할 수 있다   태어나서 죽는 생은 정해져 있어서  당신의 정면은 회피하기 좋다  시간은 무수한 측면으로 쪼개지다가  등을 남기며 사라진다   버려지는 관심 밖에서 증오가 자라고  몸은 절벽 앞에 선 자세로  터무니없는 적의를 불태운다  숭고한 원수가 온다   아무 것도 안 하는  말없는 말들이 수북이 쌓인 구석엔  먹고 흘리고 닦은 것들이 불룩하다   인간은 나무에서 내려온 혼자   여럿의 눈을 벗어난 몸 하나가  어둠 속을 배회하다가  무언가를 줍거나 툭 던지고 사라진다       -전문(p. 182-183)  ---..

납작하다는 말/ 이현

납작하다는 말      이현    겨울눈 내리는 날 엄마는 수제비를 끓였다  반죽을 얇게 펴야 맛있는 수제비가 뜬단다  얼기설기 묵은지 잘라넣은 펄펄 끓는 물에  하얗고 평평한 조약돌 같은 수제비가 떠오르면  어두운 강가에 나가 남몰래 물수제비를 띄웠다   그래, 납작하다는 말 생각하면 참 슬프다  각지고 모난 것들 얇게 펴는 그런 일  눈도 코도 입도 있는 듯 없는 듯  해저 연체동물처럼 뼈도 없이 납작하게 아, 평평하게  바람 부는 세상 위로 부유하며 떠가는 그런 일   엄마는 떠나고 몸살기 드는 겨울 저녁  묵은지 잘라 넣은 물 위에 뜬 수제비 먹는다  살아가기 위해 습관처럼 착하게 아, 비겁하게  기울어진 세상 눈 감고 모난 생각 부러 누르고  어둠 내린 허공에 목숨 하나 걸치고 떠가는 그런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