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31 5

안지영_ 희미하고 불완전한(발췌)/ 아무도 없는 우리 : 서윤후

아무도 없는 우리         겨울 밀회     서윤후    수감자들에게 처음 눈싸움을 허락한 것은 이례적인 폭설이 지나고 이틀 뒤였다 눈 치우는 사역을 이토록 다정한 방식으로 알려줄 수 있을까?   눈사람들은 모두 눈 코 입 하나 없이 표정도 없이 앞뒤 분간도 없이 기분이나 마음도 없이 산발적으로 태어났다   베개는 차가운 것이 좋다고 한다 깊은 잠에 발이 빠져본 사람만이 헤맬 수 있는 꿈의 풍경은 창백했다 풍경을 기워 꿰매는 저 발자국을 따라가볼 거라고    멈추게 하려는 마음에 사로잡혀 영원히 움직이게 된 모빌도 있다   이번 겨울잠엔 선회병에 걸린 양들이 반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다 죽은 양을 둘러싸고 수호하듯 경건히 규칙적인 애도를 미쳐버렸다고 생각한 적 있었지만   맴돌았던 걸음만이 도착할 수..

카테고리 없음 2024.07.31

김언_아무도 떠나지 않았으나 모두가···(발췌)/ 못이 자라는 숲 : 신동옥

못이 자라는 숲     신동옥    낫과 부삽을 들고  정원에서 시를 썼지 백일홍과 덩굴장미가 뒤엉키고  라일락 향을 품은 사과가 쏟아졌다  웃자란 꽃 덤불에 누웠지만 향기에는 라임이 없어서  벌 나비는 깜빡이는 커서를 선회하고  구겨버린 종이 같은 하늘이 손끝에 휘감겨 왔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 속으로 난 푸른 길을 따라  떠나는 사람을 쫓아서 길을 나섰다   그다음 거리의 시를 썼어 애초에  다듬어 놓은 정원이 오래갈 거라 믿지는 않았다  비가 그친 틈에 화분을 파헤쳐 보면  망가진 장난감과 깨진 술병투성이였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헤매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꿈속이었다  거리의 끝에는 광장이 펼쳐졌고 거기서는  저마다 자기 플롯을 이끌고 온 사람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시라고 불러온 노..

죽음을 기다리는 집▼/ 김명리

죽음을 기다리는 집▼      김명리    우산을 받아도 온몸이 젖는 세찬 빗줄기를 뚫고 파슈파티나트 사원에 도착했다   강둑 따라 늘어선 화장터에는 죽은 몸을 씻기고 꽃으로 장식하는 장례의식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강한 빗줄기들은 때로는 밧줄처럼 삼세三世의 인연을 동여매고 때로는 유리대공처럼 깨어져 허공에 흩어지기도 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지만 아직은 살아 있는 자들이 속속 도착하는 집, 화장터 입구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집이 있다   숨을 거두기 무섭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그 육신을 태워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믿음이 그 집을 세웠으리라   잠시 빗줄기의 눈금이 촘촘해졌던가 생과 멸이 화염에 휩싸이고 빗줄기마다 화엄세상이 진동한다   바그마티 강물 위 꽃잎처럼 떠 있는 몇 마리 소들은 인..

김경인_시인하다(발췌)/ 서정 : 김경인

서정      김경인    바닷마을에 갔었네  사랑하려고   겨울 한껏 낮아진   겸손한 지붕들을 돌아 나오다   보았네   멀리서  푸른 하늘 아래  순한 슬픔처럼 나부끼는  희디흰 빨래들을   나는 천천히 다가갔지  수백 오징어들이 줄줄이 꿰어  하얗게 말라가고 있었네   오장육부가 능숙하게 도려내진 채  전시되는 투명한 내부   저 멀리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참혹뿐인    -전문-   ♣ 시인하다(발췌)_김경인/ 시인  요즘의 내게 시는 이런 것이다. "저 멀리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참혹뿐"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비극이 우세한 세계에서, "도려내진 채 전시되는 투명한 내부"를 옮기는 일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죽은 듯이 침묵하다가, 문득 바라보고 증언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나는 시를..

정미주_한숨이 바람이 되는 당신의 천국(발췌)/ 스무고개 : 신동옥

스무고개      신동옥    모두 떠나는 집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집  집이 없어서 헤매는 게 아니라 헤매다 보니  집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진 집   당신이 대문에 가위표를 그리자  마법처럼 지워진 집 이 빠진 우체통에  주인 없는 편지가 쌓이고 문짝이 뒤틀리고  유리에 금이 가고   보풀 날리는 낮은 처마를 돌아간  당신은 돌아오지 않고 여기서 살기 지겨웠나  여기서 죽기 두려웠나 모두 모두  묻어두고 떠나는 집   덩굴장미 남천 줄기를 흔드는 눈보라에  도깨비들 춤추는 집 무말랭이 콩자반 거름에  짠 내 나는 구름이 뭉개고 앉은   마당 구석 웃자란 사과나무   홀로 언젠가 제 둥치에 잠들었을  당신을 기억하는 듯 버려진  화단을 점령한 꽃들은 밤에도  달빛을 끌어모으는데   나무에 등을 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