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171

수평선/ 문화인

수평선      문화인    늘 흔들리는 몸  늘 방황하는 마음   멀리 달아날까 봐  바람 불면 더 멀리 날아갈까 봐   생을 지상에 꼭 묶어놓은 선  고무줄 하나   흔들리는 바다에 늘었다 줄었다  몸을 대단하듯   눈물을 닦아주고  보폭을 맞추며   긴 세월 홀로 가는 바다를  꼭 안고 있다     -전문(p. 62)   ---------------------*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6. 5.펴냄  * 문화인/ 2012년 『한국시』로 & 2024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언젠가』

헤아려보는 파문 외 1편/ 한영미

헤아려보는 파문 외 1편      한영미    미루나무 물그림자 어른거리는 연못에  돌을 던진다   파문이 일렁일지, 퍼질지  음 소거하고 상상하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나의 퉁명이  제법 옴팡지다는 걸 알게 된다  찔끔 구름이 비췄으므로   마음은 부유물이 많아서 탁할 때가 있다  어수선하게 떠 있던 자존심도  가라앉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나무는 가지 하나 늘어뜨려  그 속이 안녕한가,  동심원을 모으고있다   던져진 돌의 파문이 누군가에게 밀려갈 때  나도 그 주름일 수 있겠구나, 라는  변명에도 구차한 무게가 있다니   공연한 구름이어서  수면 아래 속내에 영향을 미친다  서식이라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자리 잡아주는 일이라고   비견할 만한 또 다른 파문을 내 안에 둔다  흔들려 깨진..

마술의 실재/ 한영미

마술의 실재      한영미    무대 한가운데 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그가 내부를 열고 빈 속을 관객에게 확인시킵니다 그런 다음 나를 지목해 그 안에 넣습니다 상자를 닫는 동안 한 번 더 객석을 돌아봅니다 몸을 구부려 넣는 사이 자물쇠가 잠깁니다 인사가 장내를 향해 경쾌하게 퍼집니다 시작은 언제나 이렇게 단순합니다 그가 긴 칼 꺼내 듭니다 구멍이 숭숭 사방으로 열려 있습니다 하나씩 칼이 꽂힙니다 정면이기도 측면이기도 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상자를 회전시키고 뒤집습니다 비밀 따윈 애초에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리가 잘리고 팔이 잘리고 마침내 소리 없는 비명이 잘려나갑니다 그가 동백을 생강꽃이라고, 씀바귀를 신냉이리고 주문을 욉니다 나는 생강꽃이 되어 생강   생각   바닥 두드리고, 씁쓸한..

바다 4_간월도/ 나채형

바다 4        간월도     나채형    얼굴 모양  이상 표정이 다르듯  물의 깊이 결이 다르고  소리 높이도 무두 달랐지만   심장을 담은  파도 소리의 느낌은 모두 같았어   사람이 만든 바닷길에  새들이 모여 살고   제비꽃 향기를 품고 있는  온기를 느낄 수 있었지   익어가는 표정들  바이올린처럼  내 곁에 값진 사람으로 남았으면···    -전문(p. 58)   ---------------*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6. 5.펴냄  * 나채형/ 2021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사막의 보트 타기』

연인들은 혁명을 잊는다/ 한분순

연인들은 혁명을 잊는다      한분순    나비의 휘파람이  우울을 관통하며,   신비와 포옹 나눠  기쁨에 초대한다   바람은 서정의 질감  투명한 연애 편지   별들을 포식한 뒤,  혁명 잊은 연인들   꽃들만 폭주하듯  반역처럼 으르렁대   립스틱, 미사일 닮아  통속을 구원한다     -전문(p. 92)   ---------------------- * 『월간문학』 2024-6월(664)호 에서 * 한분순/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꽃잎은, 잃어버린 길처럼/ 동시영

꽃잎은, 잃어버린 길처럼      동시영    시선엔 보이지 않는 문이 있다   적막이 푸른 숲,  소리는 고향처럼 침묵을 찾아가고  꽃잎은 잃어버린 길처럼 흩어진다  꽃들의 뒷모습이 활짝 핀다   그들의 고독은 진자振子처럼 왔다 갔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오고가는  '운동방정식'을 풀고 있다   바람은 조용하면 죽는다  습관으로 길을 낸다   누군가,  화가의 물감처럼  여름을 짜내  숲에 바른다   여름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전문(p. 59)   ---------------------- * 『월간문학』 2024-6월(664)호 에서 * 동시영/ 2003년『다층』으로 등단, 시집『미래 사냥』『낯선 신을 찾아서』『신이 걸어주는 전화』『십일월의 눈동자』『너였는가 나였는가 그리움인가』『비밀..

꿈속의 향연(饗宴)/ 송동균

꿈속의 향연饗宴      송동균    나는 첩첩 산중 깊숙하게 뚫린 숲길  온몸 소름 피는 긴장감으로 걷고 있었다   아무도 없이 나 홀로만의 외로운 길  조마조마 긴장된 숲길이지만  어쩌면 내 어릴 적 그리움 피어나는  고향길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내 나아가는 길 위에  한줄기 실오리 같은 햇살이 눈이 부시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이 기적의 햇살 거머잡았고  허공에 떠 올라 어느새  아스라이 높게 피어있는 꽃구름 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때맞추어 내 앞에 나타나신 우리 어머니,  어머닌 눈부시게 하얀 목화송이로 피어 계셨다   나의 애탄 그리움으로 피어나 계신 어머니,   그러나 더는 나에게 다가서지 않으신 채  날 향한 간절한 기도와 묵시 피워내고..

이옥진_삶에 대한 평생문안(발췌)/ 메밀꽃길 : 이옥진

메밀꽃길      이옥진    안개 속 하얀 메밀꽃길이  새벽이슬에 젖어 있다   왜 이슬은, 우리들  배고픈 눈물을 닮았을까   꽃 피는 9월이면  무작정 걷고 싶던 길   울 엄니, 야야~  '배 많이 고프쟈' 하며  속울음 울던 길   저녁이 와도 그냥  허리끈 꽉   졸라매고  환하게 웃고 걷던 꽃길      -전문-   ▣ 삶에 대한 평생 문안(발췌)_이옥진/ 시인   내 고향 어머니의 바다, 그곳은 나의 출생지이자 내 문학의 발원지이며 죽어서도 돌아가야 하는 영원한 내 정신적 성소 아닌가.             *  한때는 사회적 불의에 분통이 터져 현실 정치에 도전한 일이 있다. 2014년 제6대 하남시장 출마    결국은 패거리 정치판에 실패했지만, 역시 정치는 나 같은 원칙과 정의에 철저..

카테고리 없음 2024.07.23

식은 죽 먹기 외 1편/ 이상우

식은 죽 먹기 외 1편      이상우    노랑 개나리꽃 피는 봄날 !  입학생이 담장 위에 오뚝이처럼 서 있다.  "너 왜 담을 넘니?" 하지 않고     너 대단하다.  그렇게 높은 곳을 넘는구나 !   알토란같이 하얀 아이는     이런 것은 식은 죽 먹기예요.  합기도를 하거든요.     그러니, 합기도 대단하구나 !     검도도 해요.     검도까지 너 정말 대단한 아이다.  그런데 너 식은 죽 먹어봤니?     식은 죽, 식은 죽이 뭐예요?     식은 죽은 말이다. 아주 쉬운 것이다.   입학생은 파랑 운동화를 신고  운동장을 사로질러 뛰어간다.  뒤에다 대고     옛날에는 말이다.     식은 죽 먹기도  무척 힘이 들었다.     식량이 부족했으니까?        -전문(p. 58..

동시 2024.07.22

물총 싸움/ 이상우

물총 싸움     이상우    남녀 학생이 그늘 밑에 모였다  선생님의 고함소리에  남학생이 수돗가로 뛰어간다  어미젖 먹는 돼지처럼 물을 넣는다.   남녀 학생이 그늘 밑에 모였다  선생님의 교대 신호에  여학생이 수돗가로 뛰어간다  뽕잎을 먹는 누에처럼 물을 넣는다.   남녀 학생이 운동장에 뛰어간다  선생님의 손짓 하나로  오리물총 개구리물총을 쏜다  웃는 얼굴에 뿌려 가짜 눈물이 난다.   남녀 학생이 그늘 밑에 모였다  선생님의 안전교육 평가에   방어 없이 공격만 하는 물총 싸움  전사자, 부상자가 없어 재미가 있다.      -전문- ▶ 해설> 한 문장: '물총 싸움'에서 비유적 묘사가 돋보입니다. 같은 수돗물을 마시기에 남학생은 꿀꿀꿀 돼지처럼, 여학생은 오물오물 누에처럼 비유했습니다. 그..

동시 2024.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