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171

안지영_ 희미하고 불완전한(발췌)/ 아무도 없는 우리 : 서윤후

아무도 없는 우리         겨울 밀회     서윤후    수감자들에게 처음 눈싸움을 허락한 것은 이례적인 폭설이 지나고 이틀 뒤였다 눈 치우는 사역을 이토록 다정한 방식으로 알려줄 수 있을까?   눈사람들은 모두 눈 코 입 하나 없이 표정도 없이 앞뒤 분간도 없이 기분이나 마음도 없이 산발적으로 태어났다   베개는 차가운 것이 좋다고 한다 깊은 잠에 발이 빠져본 사람만이 헤맬 수 있는 꿈의 풍경은 창백했다 풍경을 기워 꿰매는 저 발자국을 따라가볼 거라고    멈추게 하려는 마음에 사로잡혀 영원히 움직이게 된 모빌도 있다   이번 겨울잠엔 선회병에 걸린 양들이 반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다 죽은 양을 둘러싸고 수호하듯 경건히 규칙적인 애도를 미쳐버렸다고 생각한 적 있었지만   맴돌았던 걸음만이 도착할 수..

카테고리 없음 2024.07.31

김언_아무도 떠나지 않았으나 모두가···(발췌)/ 못이 자라는 숲 : 신동옥

못이 자라는 숲     신동옥    낫과 부삽을 들고  정원에서 시를 썼지 백일홍과 덩굴장미가 뒤엉키고  라일락 향을 품은 사과가 쏟아졌다  웃자란 꽃 덤불에 누웠지만 향기에는 라임이 없어서  벌 나비는 깜빡이는 커서를 선회하고  구겨버린 종이 같은 하늘이 손끝에 휘감겨 왔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 속으로 난 푸른 길을 따라  떠나는 사람을 쫓아서 길을 나섰다   그다음 거리의 시를 썼어 애초에  다듬어 놓은 정원이 오래갈 거라 믿지는 않았다  비가 그친 틈에 화분을 파헤쳐 보면  망가진 장난감과 깨진 술병투성이였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헤매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꿈속이었다  거리의 끝에는 광장이 펼쳐졌고 거기서는  저마다 자기 플롯을 이끌고 온 사람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시라고 불러온 노..

죽음을 기다리는 집▼/ 김명리

죽음을 기다리는 집▼      김명리    우산을 받아도 온몸이 젖는 세찬 빗줄기를 뚫고 파슈파티나트 사원에 도착했다   강둑 따라 늘어선 화장터에는 죽은 몸을 씻기고 꽃으로 장식하는 장례의식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강한 빗줄기들은 때로는 밧줄처럼 삼세三世의 인연을 동여매고 때로는 유리대공처럼 깨어져 허공에 흩어지기도 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지만 아직은 살아 있는 자들이 속속 도착하는 집, 화장터 입구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집이 있다   숨을 거두기 무섭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그 육신을 태워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믿음이 그 집을 세웠으리라   잠시 빗줄기의 눈금이 촘촘해졌던가 생과 멸이 화염에 휩싸이고 빗줄기마다 화엄세상이 진동한다   바그마티 강물 위 꽃잎처럼 떠 있는 몇 마리 소들은 인..

김경인_시인하다(발췌)/ 서정 : 김경인

서정      김경인    바닷마을에 갔었네  사랑하려고   겨울 한껏 낮아진   겸손한 지붕들을 돌아 나오다   보았네   멀리서  푸른 하늘 아래  순한 슬픔처럼 나부끼는  희디흰 빨래들을   나는 천천히 다가갔지  수백 오징어들이 줄줄이 꿰어  하얗게 말라가고 있었네   오장육부가 능숙하게 도려내진 채  전시되는 투명한 내부   저 멀리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참혹뿐인    -전문-   ♣ 시인하다(발췌)_김경인/ 시인  요즘의 내게 시는 이런 것이다. "저 멀리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참혹뿐"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비극이 우세한 세계에서, "도려내진 채 전시되는 투명한 내부"를 옮기는 일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죽은 듯이 침묵하다가, 문득 바라보고 증언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나는 시를..

정미주_한숨이 바람이 되는 당신의 천국(발췌)/ 스무고개 : 신동옥

스무고개      신동옥    모두 떠나는 집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집  집이 없어서 헤매는 게 아니라 헤매다 보니  집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진 집   당신이 대문에 가위표를 그리자  마법처럼 지워진 집 이 빠진 우체통에  주인 없는 편지가 쌓이고 문짝이 뒤틀리고  유리에 금이 가고   보풀 날리는 낮은 처마를 돌아간  당신은 돌아오지 않고 여기서 살기 지겨웠나  여기서 죽기 두려웠나 모두 모두  묻어두고 떠나는 집   덩굴장미 남천 줄기를 흔드는 눈보라에  도깨비들 춤추는 집 무말랭이 콩자반 거름에  짠 내 나는 구름이 뭉개고 앉은   마당 구석 웃자란 사과나무   홀로 언젠가 제 둥치에 잠들었을  당신을 기억하는 듯 버려진  화단을 점령한 꽃들은 밤에도  달빛을 끌어모으는데   나무에 등을 대고 ..

황유지_파롤의 빈손이 떨려올 때(발췌)/ 들쥐와 낙엽 : 김건영

들쥐와 낙엽      김건영    신자유주의의 모기가 방안을 떠돌고 있다 겨울에도 모기가 있다 자유란 얼마나 가려운 것인지 집이 부풀고 있다 굴러다니는 것들이 바깥에 있다 밟으면 부서지거나 터지는 것들 안에서 바깥으로, 다시 바깥으로부터 안으로의 검열이 있다 어린아이가 길에서 은행잎을 줍는 것을 보았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을 여닫는 사이 길에서 은행잎을 줍는 것을 보았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을 여닫는 사이 들이지 않은 것들이 들어온다 저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검역 속에서 막아야 하는 것들 속에서 내가, 내가 자주 집으로 돌아온다 쌀에도 벌레가 있다 이 집은 안전하니 한 마리쯤 더 키웠으면 좋겠군 그 은행잎들은 어디로 들어가게 되었을까 모든 집..

세상 가장 작은 뼈에게▼/ 정끝별

세상 가장 작은 뼈에게▼        정끝별    귓속 고막에서 달팽이관 사이  귓속뼈를 이루는 망치뼈, 모루뼈, 등자뼈라는 가장 작고 가벼운 뼈들이 가장 나중까지 듣는다기에  들을 때 속귀의 귓속뼈들이 움직인다기에   임종을 선고한 의사가 나가자  아직 따뜻한 엄마 겨드랑이에 손을 묻고  엄마 귀에 대고 말했다   엄마의 가장 작은 뼈들을 내 작은 목소리로 어루만지며   엄마,   엄마가 돌아간 시간을 잘 기억할게  엄마도 잘 기억해서 그 시간에 꼭 찾아와야 해      -전문(p. 80)    ※ 제목 끝에 [▼] 표시가 된 작품은 시인들이 직접 뽑은 1~2년 내의 근작대표시입니다. 이 작품은 현대시 작품상 후보작으로 검토됩니다.    ---------------------------  * 『현대시』..

추모-시) 퀸/ 이초우

추모>     퀸     이초우(1947-2023, 76세)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언제나 어린 나를 손잡고, 난 아빠와 결혼할래, 내 고갱이 속에  아버지가 자꾸만 자라나는 여왕의 자리에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어요.   내 머리카락은 광명단처럼 붉었고, 우아한 인형의 옷 같은 내 원피스, 격조 높은 붉은색 유화를   그렸지요 여왕이 돼 가던 나의 아버지, 전교 수석이란 날 유령처럼 희롱한 그 아이들, 함께했던 나의 하느님은 몸시 바쁘셨나 봐요.    내가 세상의 디자인을 구상할 때였어요. 어쩐지 난 두 개의 손만으론 내가 여왕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시시각각 우아! 하고 절규하곤 했지요. 그날 밤 나는 푸른 두 손바닥 위에 부처의 얼굴을 디자인해 넣었어요. 오! 나의 또 다른 손들.  ..

입동/ 박성우

입동     박성우    상강에 날아왔던 물오리들이 물결을 당겨 펴며 물그물을 쳤다   텃밭에서 몸집을 키우던 배추 두 포기가 뿌랭이만 남기고 갔다   포플러 가지 끝에 올라 흔들흔들 울던 까치가 겅중겅중 뛰었다   고춧대 뽑아낸 자리로 들어가 기지개를 켜는 겨울초가 푸르렀다   무시래기 삶는다던 팽나무집 할머니가 마당가 화덕에 불을 넣고   물오리같이, 배추 뿌랭이같이, 까치 꽁지깃같이, 겨울초같이 서 있었다     -전문(p. 23)   ------------------------  * 『현대시』 2023-12월(408)호 에서  * 박성우/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환절기/ 이심훈

환절기      이심훈    스쳐 지나는 바람의 표정도 수시로 변해  흘러가고 나면 되짚어 올 수 없는 감정   한 번 건너면 오지 못하는 환절기   강변 마른 갈대숲 살얼음으로 엉킨  옷자락 붙잡아 주기를 바라는 꽃샘 길   쇠기러기들 일순 날아올라 먼 길 떠난다.    평생 걸리고도 남을 가짓수를 품은 감기  견디는 것 외 치료법이 없는 불치의 감성   막힌 인후가 풀리고 기침이 터져야 봄이다.   지난 계절 서운했던 일들일랑 거둬들이고  혹여 서운하게 했던 일들이나 헤아려 보며   마음 비운 그 언저리에 가랑잎 모여든다.   겨우내 언 삭신 풀려 흐르는 여울목 버들개지  풍향계 방향 바뀌는 쪽으로 귀 기울이는 곡선   미련 없이 돌아서 갈 줄 알아야 철새다.   -전문, 시집 『뿌리의 행방』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