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8 3

곽효환_'오래된 책'과 '미래의 책' 사이에서(발췌)/ 오래된 책 : 곽효환

오래된 책      곽효환    하늘 가득 펑펑 쏟아진 눈 쌓이고 동장군이  동네 꼬마들의 바깥줄입을 꽁꽁 묶은 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감자며 고구마를 삶고  누이와 나와 사촌들은  구들방 아랫목에 깐 이불에 발을 묻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릴 적 약을 잘못 먹은 탓에  길눈이 어둡고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어느새 마을 최고의 흉내쟁이이자 이야기꾼이 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밤 깊어도 마를 줄 모르고  아이들은 졸린 눈을 부비며 귀를 세우다가  하얀 눈을 소리도 자국도 없이 밟으며 온다는  눈 귀신에 진저리 치곤 했다   다음 날이면 나는  말 한마디 토씨 하나 숨소리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외워서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 서사 그 느낌 그 흥분을  에워싼 동리 아이들 앞에서 ..

저물면서 빛나는 사람들/ 곽효환

저물면서 빛나는 사람들      곽효환    작열하는 햇빛과 찌는 듯한 무더위가 깊어  꽃들도 풀들도 지쳐 고개를 떨구는  기울고 시들해지는 저무는 시간 비로소  단단한 중심이 되어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더 화려하게 피는 능소화 같은   더 그윽하고 강인하게 피는 무궁화 같은  여름 내내 피고 또 피는 백일홍 같은 사람들   1.  책과 거문고, 꽃과 그림 그리고  술과 도연명을 사랑하여  맑은 시냇가에 집을 지은 유학자의 후손*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고자 하였다  의병운동에 뛰어들었고  학교를 세워 구국 계몽운동에 헌신했으나  끝내 나라가 망하자  지천명이 훌쩍 넘은 나이에  가산을 정리하고 솔가해 두만강을 건넜다  무관학교를 세워 강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힘으로 맞서 나라를 찾고자  죽는 날까지..

바다의 착시(錯視)/ 윤명규

바다의 착시錯視      윤명규    무슨 일로 햇살은 조각조각 깨어졌나  수평선에 부유하는 태양의 살점들  포충망 휘저으며 바람은 달려오고   아직 잡을 그 무엇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황금 깃털  그물코를 빠져나간다   주저앉고 싶기도 했을 텐데    꺼지지 않는 욕망의 무게가  도대체 얼마였길래  몸뚱이 깎이는 줄 모르고 있을까   추락해 익사한 하늘이  그보다 더 짙게 젖는 오늘     -전문(p. 40) ---------------*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6. 5.펴냄  * 윤명규/ 202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허물의 온기』『흙의 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