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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아_두더지 언덕으로 산 만들기(발췌)/ 브라네 모제티치 詩 : 김목인 譯

내가 지켜보는 동안 개는 들판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브라네 모제티치/ 김목인 譯    내가 지켜보는 동안 개는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이따금 킁킁대고는 다시 달린다. 원을 그리며 가서. 주로 두더지 언덕들 주위에서 냄새를 맡더니. 곧장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나는 내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에 산만해진다. 곧 갈게요. 뭐하고 계세요? 저명한 여성 시인이 묻는다. 독서 중인가요? 집필 중? 공원이 아마 멋지겠죠. 아뇨, 아뇨, 나는 당황한다. 두더지 언덕들을 보고 있어요······ 저의 개가 그 속에 코를 들이밀어서요. 오, 정말요? 전 작업 중이실 거라 생각했어요. 알겠어요, 끝나면 전화할게요. 개는 이제 가장 큰 언덕부터 시작해 킁킁거리며 맹렬히 땅을 판다. 나는 총명한 시를 쓰기에는 너무..

외국시 2024.07.20

생은 무거워/ 이영춘

생은 무거워       공동묘지 앞을 지나며        이영춘    생들이 흙속에 누워 있다 피안의 언덕 그 무덤 속에  무덤 속에서 저마다 알 수 없는 방언을 쏟아낸다  '생은 무거워, 무거워' 중얼거리는 소리 바람을 타고 건너온다  오백 년 전 세世, 사라진 내가 안개로 피어올라 무덤을 쓰다듬는다  간헐적인 숨결처럼, 파리한 눈물처럼 무덤들이 하얗게 흔들린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와 같은 박제들이  박새 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허공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날개  알약을 삼킨 생, 세상을 등진 생, 강물에 뛰어든 생,  빗물로 흐느낀다  박제 속에서 박제를 해부하면서  생이 무거워, 너무 무거워, 가쁜 숨 몰아쉬면서  흙무덤 속으로 간다  그 무덤 위로 스러지는 구름 한 점      -전문(p. 2..

첫닭/ 박만진

첫닭     박만진    한가윗날 보지 못한  보름달을   양력 시월  새벽 일찍 보네   저 먼 첫닭,   얼마나 목을 길게 빼면  울음 또한 저리 길까   이웃 일손들의 새벽잠을  서둘러 깨우려 하나   저 먼 첫닭,   얼마나 목을 곱게 빼면  울음 또한 저리 고울까   그래, 사람아!   맨 처음 우는 닭이  첫닭이 아니라   맨 처음 듣는 소리가  첫닭이네   -전문(p. 200-201)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박만진/ 1987년『심상』으로 등단, 시집『오이가 예쁘다』『붉은 삼각형』『바닷물고기 나라』『단풍잎 우표』등 10권, 시선집 『꿈꾸는 날개』등 3권

탑/ 박금성

탑         원원사지 동 삼층석탑     박금성    그는, 바람과 구름이었으나  소원의 흔적   오로지, 하나의 소원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을 향하여  쩡쩡, 땡볕을 가르며  오르는 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층층이 쌓이는 셀 수 없는 갈등과  선명해지는 사랑들  그럴수록 굳게 다듬어지는 불퇴전의 결연   그는 구름처럼 지워지고  바람처럼 잊혔어도  운명이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눈과 손이 멈추어야 할 곳에서  탑의 수연에 마음을 가두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의 소원이  더 높이 오를 듯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데   무명에 탑신의 옥개가 떨어져 나가고  벽력에 옥신이 흔들려도  오르고 오를 듯 원력을 다시 세우는데   그래, 활화산이 탑을 덮친들  그의 소원이 끊기겠느냐  미래가 다하여 세상이 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