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아무도 없는 몸/ 정병근

검지 정숙자 2024. 7. 19. 17:58

 

    아무도  없는 몸

 

     정병근

 

 

  혼자는 언제든 상하기 쉬운 자세로

  뒤통수에 깍지를 끼거나 다리를 턴다

  발톱이 자라고 털이 우거진다

 

  비밀 하나를 공유할 때

  우리는 겨우 신뢰할 수 있다

 

  태어나서 죽는 생은 정해져 있어서

  당신의 정면은 회피하기 좋다

  시간은 무수한 측면으로 쪼개지다가

  등을 남기며 사라진다

 

  버려지는 관심 밖에서 증오가 자라고

  몸은 절벽 앞에 선 자세로

  터무니없는 적의를 불태운다

  숭고한 원수가 온다

 

  아무 것도 안 하는

  말없는 말들이 수북이 쌓인 구석엔

  먹고 흘리고 닦은 것들이 불룩하다

 

  인간은 나무에서 내려온 혼자

 

  여럿의 눈을 벗어난 몸 하나가

  어둠 속을 배회하다가

  무언가를 줍거나 툭 던지고 사라진다 

      -전문(p. 182-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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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23-여름(92)호 <신작시> 에서  

* 정병근/ 1988년 계간 『불교문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번개를 치다』『태양의 족보』『눈과 도끼』『중얼거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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