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171

비로소/ 문현미

비로소               서대문형무소    문현미    콩밥 한 덩이로 끼니를 채우고 있었다는  그 한마디에   빈대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버텼다는  캄캄한 고백에   염천에 똥통이 끓었고 악취가 온몸을 덮쳤다는  폭력적인 이상 기후에   어느 누구도 괴로워하지 않았고  샛별처럼 빛나는 눈들만 있었다고   이름도, 출신도, 고향도 다르지만  바라는 것은 오직  잃어버린 나라를 반드시 되찾겠다는  시퍼런 얼음장 절규에   와락, 떨고 있다   가진 것이라곤 목숨뿐이었던 그들   전부인 만신창이를 오롯이 던져서 얻고 싶었던  꿈의 발화는   생지옥 같은 겨울이 지나가고 난 뒤에야  피어났다, 비로소     -전문(p. 166-167)  ---------------------- * 『시현실』 20..

이팝나무 아래서/ 맹문재

이팝나무 아래서      맹문재    밀려오는 파도의 저 너머에  얼굴들이 있구나  바위처럼 침묵하면서도 눈뜨고 있었구나   힘은 가까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요란한 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방향에서 오는 것도 아니구나   파도를 밀고 오는 힘은 나의 과거일 것이다  나의 선택일 것이다   이념이 약하고  경험이 부족하고  전망을 못 가져   분노하지 못한 채  고리高利에 참사당한 시간들   가난한 뿌리가 지상 위로 올라오는구나  서러운 노래가 여울물처럼 나아가는구나   이팝나무들이 바람을 모아 하늘을 흔들 때마다  꽃들이 부푼다   밀려오는 꽃들의 저 너머에  얼굴들이 있구나      -전문(p. 162-163) ---------------------- * 『시현실』 2024-여름(96)호 에..

봄나물 철자법/ 김정자

봄나물 철자법     김정자    장날 노점에 앉아  봄나물 파는 할머니들  박스 쪼가리에 적어놓은 나물 이름들이  조금씩 철자법 틀려 있다.   좀 틀리면 어떤가  원래 봄은 연하다, 연해서  아무리 제대로 적어놓아도 제풀에 시들거나  하늘거리는 법이라서  어떤 글자들이라도 조금씩 받침이 틀리고  기역자가 쌍기역으로  그 햇순이 늘어난다.   참나물, 방풍나물, 원추리 같은 이름들  조금 더 봄이 깊어지면  스스로 살이 올라 꽃피울 것이다.   봄의 근처는 멀어도 봄  조금 삐뚤어지게 적어도  다들 반듯하게 읽는다.   오래된 이름들도  봄엔 생각나지 않고 몇몇은  성씨도 이름도 제멋대로 기억나지만  찬찬히 떠올려 보면 이름들마다  다 꽃이 피어 있다.     -전문(p. 149-150)    ----..

새와 상징/ 강병철

새와 상징      강병철    까치가 짧은 노래를 부른다.  당신의 모국어로,  누가 듣는가?   딱따구리가 나무 위로 올라간다.  딱딱딱  톡톡톡  클롭   클롭   클롭  퐁퐁퐁  카다 카다 카다  당신의 상징으로 듣는다.   까마귀가 카카카 울어댄다  누군가는 까악 까악으로 해석한다  당신의 모국어로   누가 듣고 설명하는가?  독수리가 울타리 너머로 날아간다  푸른 하늘 아래,  먼 하늘에 사슴 떼가 날아간다      -전문 (p. 139)  ---------------------- * 『시현실』 2024-여름(96)호 에서 * 강병철/ 2016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목포에서 배틀을 읽다』영한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6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6      정숙자    언덕 너머 한 마을이 있었는데요. 먹을 것 입을 것 함께 사랑도 넉넉한 동네였어요. 신나는 여름, 눈부신 겨울, 너나없이 마음은 천사였고요. 언덕 너머 그곳엔 비 오는 날도 어둡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문득 눈 떠보니···  되돌아ᄀᆞ는 길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꼭 좀 알려주세요. 꿈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그 동네 어, 어, 어귀만 알아도 좋겠습니다. (1990. 11. 20.)                책에 날아와 앉은, 피리어드 10호만 한 날벌레  몸 자체에 점성이 있는가 보다, 훅    훅훅   입김을 세게 불어도 좀체 떠나지 않는다   졌다,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읽기도 뚝.  더는 볼때기 부풀려 바람을 쏘지도 않고  기다린다, 그..

카테고리 없음 2024.07.25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6/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6      정숙자    언덕 너머 한 마을이 있었는데요. 먹을 것 입을 것 함께 사랑도 넉넉한 동네였어요. 신나는 여름, 눈부신 겨울, 너나없이 마음은 천사였고요. 언덕 너머 그곳엔 비 오는 날도 어둡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문득 눈 떠보니···  되돌아ᄀᆞ는 길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꼭 좀 알려주세요. 꿈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그 동네 어, 어, 어귀만 알아도 좋겠습니다. (1990. 11. 20.)                책에 날아와 앉은, 피리어드 10호만 한 날벌레  몸 자체에 점성이 있는가 보다, 훅    훅훅   입김을 세게 불어도 좀체 떠나지 않는다   졌다,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읽기도 뚝.  더는 볼때기 부풀려 바람을 쏘지도 않고   기다린다, ..

박성준_"연습하는 마음"의 거부(발췌)/ 칠흑 : 안숭범

칠흑漆黑     안숭범     병원을 지났다, 누구는 지금도  아파할 것이다, 좀처럼 하지 않는 표정을 생각해 냈다, 반쯤 내려진 제과점 셔터가 주인을 두 동강 냈다, 살아남은 빵들만 냄새로 다녀갔다, 휴대폰이 오른손으로 기어 왔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했으므로, 누구와는 아무 숫자도 교환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구름은 또 거기서 서성였다, 오늘 하루만도 수없이 이 길 저길을 오갔다, 당신도 알 것이다, 그렇게 오는 밤은 구름의 망설임을 머금는다, 버스가 멀리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다, 멀어지는 것들 사이에 남은 건, 매연이거나, 사랑이거나, 매연같은 사랑이다, 그런 식으로 침침한 채 버스와 사람은, 서울역과 우체통은, 하수도와 전선은 곧잘 닮아간다,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게 모든 불투명은 떠..

외국시 2024.07.25

그날의 바다/ 윤정희

그날의 바다      윤정희    하나의 배경이 되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바닷가를 거니는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이 되어   은빛 잔물결이 노를 젓듯  억겁의 시간 위에 흔들리는 배  해풍에 그을린 낯선 사내  맨발에 다부진 몸짓  생의 그물에 걸린 야성이  날 생선처럼 펄떡였다.   바다가 펼쳐 놓은 풍경 속으로  흠뻑 젖어드는 내게  눈에 익은 사내는 뱃사람 앞에선  낭만을 말하지 말라  속, 뒤~ 빈다고~!  목숨 걸고 배 띄워 갯바람에  살 터지는 그날그날이  뱃사람의 삶이라고···,   거친 산맥을 넘어오다 지친 바람처럼  한, 호흡을 내려놓은 사내의 눈에  육신이 농기구라던 아버지모습 얼비쳐  설움처럼 붉어지던 하루.   절로 나는 들풀처럼  달려드는 그날의 바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세월..

한분순_ 서정의 포옹, 바람(전문)/ 바람에게 반하다 : 한분순

바람에게 반하다      한분순    한     올  손에 쥐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풀내, 꽃내가 섞여  머리가 말갛다  그 속에  숨을 포개며  별에 오른 꽃 나비    -전문-   ♣ 서정의 포옹, 바람(전문)_ 한분순/ 시조시인  바람은 투명한 연애편지와 같다. 시인이라면 바람에게 반한다. 바람의 형식은 자유이며 그 내용은 초월이다. 평화롭게 다정하며 쟁투만큼 서슬 있다. 무형이므로 허무처럼 여겨지되 어디에나 깃들어 충만하다. 그것은 서정의 질감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낱말은 군대가 된다. 인쇄된 검은 활자는 신의 그림자처럼 놓여 있다. 오늘날 문학에서 현대성은 시간 개념이 아닌 공간 속성을 가리킨다. 바람은 야생 풍경을 넘어서 대도시를 휘감으며 속속들이 구획을 점령하므로, 그 자체가 현대적이다..

이태동_ 봄의 들판에서···/ 나는 구름처럼 외로이 거닐었다 : 윌리엄 워즈워스

나는 구름처럼 외로이 거닐었다      윌리엄 워즈워스(영국 1770-1850, 80세)     이태동 번역(영문학자, 서강대 명예교수)    계곡과 산 위에 높이 떠도는   구름처럼 외로이 거닐다 나는 문득 보았네.  수없이 많은 금빛 수선화가  호숫가 나무 아래  미풍에 한들한들 춤추는 것을.   은하수에서 빛나며  반짝이는 별들처럼 길게 연달아  수선화들은 호반의 가장자리 따라 끝없이 줄지어  뻗어있었네.  나는 보았네. 무수한 수선화들이  흥겨워 머리를 흔들며 춤추는 것을.   수선화들 옆 물결도 춤췄었으나,  환희에 있어 그것들이 반짝이는 물결을 이겼었지.  이렇게 함께하는 즐거움 속에  시인이 어찌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나는 보고 또 보았다. 그러나 이 광경이  어떤 값진 것을 내게..

외국시 2024.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