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7 7

장군섬 근처/ 문화빈

장군 섬 근처     문화빈    마을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장군섬 근처까지 가서 주낙을 폈다   왕창 잡으면  청소기도 사 주고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도 보내주고   파도 더미가 편측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선체는 주낙의 방향과는 전혀 딴 데로 튕겨져 나간다   멀리 갈치밭에  수십 척 떠 있는 주낙배의 어화 불빛이  나를 안쓰러워한다   바다가 말을 듣지 않는다  바다가 나를 거부하고 있다     -전문(p. 35)   ---------------* 군산시인포럼 제4집 『바다의 메일』 에서/ 2024. 6. 5. 펴냄  * 문화빈/ 202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파이(π) 3.141592...』

박상태_동화와 투사 그리고 이미지/ 사슴 : 노천명

사슴      노천명(1911-1957, 46세)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전문-   ▶동화와 투사 그리고 이미지(부분)_박상태  서정시는 개인의 희로애락의 감정 가운데서도 정제된 것을 풀어내는 형식이다. 또한 서정시의 장르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시 정신 또는 시적 비전이 시인 자신의 세계관과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 캘더우드(James Caldewood)라는 문학 이론가에 따르면 시인이 의식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방법은 동화(assimilat..

반사경/ 오승연

中     반사경      오승연    주차장 입구 측백나무 가지에 반사경이 걸려 있다  누가 저렇게 아름다운 눈동자를 만들었을까  측백나무 초록이 한껏 떠받들고 있다   다가오는 것들마다 누르고 자르고 찌그러뜨리는  저 반사경은 유머를 아는 종족 같은데   오늘은 아랫집 새댁의 부른 배를 내 자동차 유리창으로 밀어 넣는다    언제 눈을 깜빡이는지 본 적은 없지만  더러는 저 눈빛을 피해 지나간 사연들도 있을 테지만   사람도 자동차도 한 번 눈에 들면  왜곡된 시선이 진실이 되는지  어쩌다 충혈된 눈으로 이마를 찌푸리기는 한다   핏빛 노을 없이도 뜨거운 눈빛으로  산목숨에 제 목숨을 내걸고 있는 반사경 얘기일까   우리 동네에는   측백나무에 눈이 달려있다는 소문이 있다     -전문(p. 220)..

그릇, 되다/ 류미월

그릇, 되다      류미월    콩 심은 데 콩 나는 건 흙이 만든 진리죠  어른들은 올바르게 참되게만 살라지만  흑흑흑  잘못이 없어도 그릇되다 말해요   성당 옆 모퉁이에 문을 연 '그릇된 흙'  간판을 읽다 보니 조금은 당황스럽죠  그릇이 된다는 건지  흙이 잘못이라는지   잘못된 흙이라면 그릇이 되지 않겠죠  식탁 위에 장식장에 우아하게 자리잡은  올바른 도자 그릇이  꽃을 물고 피어나요     -전문(p. 99)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류미월/ 2008년『창작수필』 & 2014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산문집『달빛, 소리를 훔치다』, 시조집『나무와 사람』

흔들리는 빛/ 김삼환

흔들리는 빛      김삼환    말을 잃어 쓰지 못한 빈 노트를 앞에 놓고  천 년 전 앙코르왓 연못 속에 잠긴 하늘  흔들린 불빛마저도 멀어지는 적도의 밤   추억 깊은 사진 한 장 꺼내다 마는 시간  손을 놓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아득쿠나  제 자리 찾지 못하고 나뒹구는 석상 하나      -전문(p. 97)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김삼환/ 1991년『한국시조』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조집 『적막을 줍는 새』『왜가리 필법』『묵언의 힘』등

철야/ 김창훈

철야     김창훈    밤이 되었다  하루의 문장이 소금에 절인 듯 쪼그라든다   바다를 피해 사막으로 갔다  천장에는 달과 별이 보이지 않는다   목이 말랐고 모래는 차갑다  낮에 보였던 발자국을 바람이 가져갔다  방향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사막과 달의 색은 잘 어울린다  모래에서 살 냄새가 난다  얼굴을 묻어버리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다  한쪽은 사라지고   눈썹 사이에서 시계 소리가 난다  먼 곳으로부터 가까운 곳을 기억하는 습관   내일의 문장을 여러 번 연습해 본다  자주 몸을 뒤집는다   입에서 모래가 씹힌다  새벽 네 시,  내가 나를 밀어내고 있다    -전문(p. 90-91)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김창..

'내가 보이면 울어라'/ 김효운

'내가 보이면 울어라'         강이나 하천의 수위가 낮아지면 바닥의 돌이 물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때 드러난 돌에 문구와 연도를 새겨넣었다. 이 돌을 헝거스톤이라고 한다.      김효운    체코 엘베강에서 1616년 '내가 보이면 울어라.'라고 새긴 돌이 발견되었다는데   나비가 발바닥에 꽃가루를 묻히듯  출생연도를 이마에 타투로 적어두고  오갈 든 강물 속에서 드러난 맨살   빠르게, 편하게, 쉽게  꽃과 바람 사이를 헤매는  이기심을 피해 버티고 버티다가  죽은 꽃잎처럼 달린다   내가 찍은 탄소발자국 줄이는 길을  너에게 묻는다   곧장 달리고 싶지만  기억을 되짚어 되돌아가는 길은 너를 복기하는 형식이다  낯설지 않다    -전문(p. 8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