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6 6

독해/ 한선자

독해     한선자    독을 품은 연기였다   마주 잡았던 손바닥에 금이 갔다   터널 속에서 비로소  오래 믿었던 마음이 연기라는 걸 알았다   바다로 갔다  온몸에 달라붙은 독을 씻어내고 싶었다   수평선 너머 누군가 버린 것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독해가 불가능한 슬픔, 고집 센 주어, 토막 난 12월까지  바다에 던졌다   타다 만 붉은 잔해들 둥둥 떠 있었다   바다가 자꾸 손바닥을 닸았다   물음표를 물고 다니던 갈매기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물음에 독해지기로 했다     -전문(p. 28-29)  ---------------* 군산시인포럼 제4집 『바다의 메일』 에서/ 2024. 6. 5. 펴냄  * 한선자/ 2003년 시집『내 작은 섬까지 그가 왔다』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울..

연대의 힘/ 양선규

연대의 힘      양선규    처음에는 아주 작은 하나의 빗방울이었다 오랜 가뭄이 들면 간절한 기다림이었다가, 큰비 내려 홍수가 나면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도착한 물들과 부둥켜안고 크게 기뻐했으나 금방 서로 멀어져 가며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다가 부딪치고 깨어져 하얀 포말이 되어서야 알았다   잊힌 게 아니었다 빙산처럼 각자의 포부대로 큰물과 합류하고 있다는 것을, 바다에 와서 보았다 아무리 큰 폭풍이 불어도 끄떡 않는, 어깨와 어깨 모여 만든 깊고도 푸른 장엄한 바다의 고요를 보았다    -전문(p. 68)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양선규/ 1998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까막별/ 안오일

까막별     안오일    반짝이지 않아도  나는 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까막 까막 까막  나만의 시간을 수놓는   반짝이지 않아도  나는 빛   -전문(p. 94)    * 까막별: 빛을 내지 읺는 별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안오일/ 2007년《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시집『화려한 반란』, 청소년 시집『그래도 괜찮아』, 동시집『뽈깡』 외 여러 시집과 동화와 청소년소설이 있음

동시 2024.07.16

심금(心琴)/ 이복현

심금心琴     이복현    내 안의 거문고는  폭풍을 견딘 풀잎 하나  일어서 흐느낄 때  함께 운다.   견고한 산을 울리고  험산 준령을 몇 고개 넘어  하늘에 닿을 때, 마지막  줄이 끊기듯 절규한다.   나의 거문고는 다만  풀잎 하나로 울고  울음은 멀리멀리  천 산을 흔든다    -전문(p. 41-42)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이복현/ 1994년《중앙일보》 시조 장원으로 등단, 시집『사라진 것들의 주소』, 시조집『눈물이 타오르는 기도』등

암벽등반가 K에게/ 김종태

암벽등반가 K에게      김종태    파도가 바다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에게서 들은 적 있다 슬픔이 이승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에게서 들은 적 있다 그리움이 사랑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에게서 들은 적 있다 그의 이력을 눈치 챈 누군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어느새 그는 먼 산정 위 전신주로 서 있었다   오르고 또 내리는 동안 그의 청춘은 모래알처럼 산산조각 났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부스러져 내린 모래알을 모아 거대한 부처를 만드느라 주말마다 단단한 절벽을 기어올랐다 심산의 기도처를 찾는 수도자처럼 수시로 기어올랐다 집채만 한 돌의 둔감함을 견디며 돌담의 층계를 맨발로 더듬었다 결국 올라간 그 끝에서 투명한 실오라기를 붙잡은 거미처럼 빙글 흔들리다 다시 사뿐한 하강을 준비하였다   아, 눈부신 ..

이끼꽃/ 최옥

이끼꽃      최옥    이끼에 꽃이 피었다 이끼에도 꽃이 피다니  물기 마를 날 없는 습지에서  수도승처럼 사시사철 옷 한 벌로 사는 줄 알았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엎드린 채  물이 지나간 자리, 그늘이 머물던 때를 놓치지 않고  조용히 영토를 넓히더니 쌀알 같은 꽃을 피웠다   점점이 찍어놓은 암호 같은 꽃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핀 어린 백성 같은 꽃  어쩌면 햇빛에 대한 반란일까  쌀알 같은 이끼꽃에서 푸른 숨소리가 들린다     -전문(p. 35) ---------------------- * 『시와문화』 2024  여름(70)호 에서 * 최옥/ 1992년『시와비평』으로 등단, 시집『엄마의 잠』『눈물 속의 뼈』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