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171

안시성(安市城)*/ 박재화

안시성安市城*       박재화    중원을 차지하고 티벳 돌궐 등을 제압하여 기세를 떨치던 당 태종 이세민, 그러나 643년 황제의 위신이 떨어져 태자도 마음대로 못 세우고 신하들 앞에서 자살소동도 벌이다가 권위 회복차 644년 2월 고구려**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니   유목민 기마병을 앞세운 그의 50여만 대군은 개전 초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을 점령하며 기고만장, 드디어 645년 6월 20일엔 안시성 가까이 이르렀으니   이때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수도를 지키면서 대대로大對盧 고정의高正義로 하여금 군사 15만을 이끌고 이세민과 맞서도록 하였으니   고정의는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에게 군사 4만을 주어 수비위주로 싸우면서 적을 피곤케 하고 보급망을 끊어라 당부했건만 젊은 고..

나와 마주하는 시간/ 최도선

나와 마주하는 시간     - 시터 동인 제6집 『시터』      최도선       이 기록의 주제를 이루는 괴이한 사건은 194×년 오랑에서 일어났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19세기 초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을 모티브로 하여 쓰인 이 소설을 30년 전에 읽을 땐 그저 작가가 그려낸 소설로만 읽었었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 다시 꺼내 읽어보니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 그 책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페스트 환자들을 수용할 곳이 없어 시립경기장에 임시 진료소를 설치했다. 등등    전율을 느꼈다.   우리 동인도 모임을 가져본 지 1년이 넘는다. 이런 난제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 올해도 동인집을 묶는다. 벌써 제6집이다. 비대면 시..

권두언 2024.07.09

바람같이 사라지다/ 황상순

바람같이 사라지다      황상순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풀숲 고인돌 밑에 들어 몸을 숨기고  가만히 문을 닫는다  이곳은 오래전에 숨겨놓은 비밀의 방  햇빛에 바래고 월광에 물들 때까지*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리라     -전문(p. 39)   * 褪於日光則爲歷史(퇴어일광칙위역사)    일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染於月色則爲神化(염어월색칙위신화)    월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출전: 이병주 대하소설 『산하』)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황상순/ 1999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름치 사랑』『사과벌레의 여행』『농담』『오래된 약속』『비둘기 경제학』등

당신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외 1편/ 이효영

You be good. See you tomorrow. I love you. 외 1편    이효영    오늘도 혼자 대형마트에 갔습니다 빈 새장 하나를 샀습니다   1.    진열장마다 가득한  세상의 모든 입술  어제 본 것들과 불쑥 돌출된 것들  많을수록 좋습니가 내일이 만개합니다   차곡차곡 장식된 나의 새장들이  천장 높이 퍼덕이고  언젠가 진짜  한 쌍의 노란 새 가지겠지만  나는 다시 만날 약속을 해 봅니다  내일 보자 그렇게  말하는 중입니다   2.   어떤 유머도 아름다운 노래를 이길 순 없겠지요  그래도 새장의 창살은  건치健齒 같아 좋습니다 고르고 건강한 날들  호두가 사탕인 줄 알고 빨아 대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알맹이 사르르 녹아들 순간을 기다리다   나는 어른의 목청을 가..

선미장식의 계단/ 이효영

선미장식의 계단      이효영    가파른 계단을 내려올 때, 나, 나 불현듯 깊다. 실체보다 무겁거나, 실체보다 빠르다. 계단을 타고 있지만, 계단보다 조금 더 앞이다. 쏠리는 각도는 전부, 갈무리하는 나,   가파른 계단을 내려올 때, 나, 비를 맞고 있는 것만 같다. 비의 한가운데 혹은, 비 자체로서 나, 다 떨어지지 못했다. 하늘과 땅 사이, 천둥의 한 점 발현과, 만물의 진동 사이, 그사이, 아니 비를 맞는 것이 아니라, 비의 메커니즘을 맞고 있는, 나,   실체보다 전진, 실체보다 전위, 실체보다 첨예, 가파른 계단을 내려올 때, 나는 최고로 섬세하다, 콧날이 살아 있다, 슉 슉 슉, 각도의 숨찬 소리도 들려, 고집스레, 비에서 쏟아지는 비처럼, 나를 뚫고, 나를 덮는, 나,   가파른 계단..

매지리 호수/ 김성수

매지리 호수      김성수    호수 낀 산책길에 벚꽃 잎이 날리면  하르르 날아가는 수많은 꽃나비들  눈부신 사월 시공時空에  춤사위가 고와라.   호수가 너무 맑아 하늘도 빠져 있고  하늘을 흐르던 구름도 빠졌는데  동동 뜬 구름장들을  물오리가 건져 먹는다.   사람도 나무들도 물구나무로 서서  온 하루 그렇게 빠져 있어도  모두가 흥겨워하는  매지 호수 산책길.   호수에게 살며시 물어 보았다.  무엇이 우리 맘을 사로잡고 있느냐  호수는 빙그레 웃기만 한다  인자한 어머니 미소와 같이.     -전문(p. 68)   ----------------------- * 『다층』 2024-여름(102)호 > 에서 * 김성수/ 1984년 ⟪조선일보⟫ 동시, 1994년⟪평화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

누군가 툭, 운다/ 박희연

누군가 툭, 운다     박희연    우리는 봄마다 목련을 센다.  우리는 우리였지만  저마다 혼자 그 꽃을 센다.  수를 세는 일은 늘 지루해  숫자가 지루할 때쯤  지루한 목련이 떨어진다.  목련이 지나간 골목 철쭉이 피고  철쭉이 지나간 골목 장미가 피고  장미가 지루할 무렵 장마가 온다.  그 골목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애인은  두 번째 괄호를 열고 시름에 잠긴다.   세상에 해명해야 할 일들은  애써 찾지 않아도 꽃처럼 피고 지는데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괄호를 친다.  다시 우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저마다 혼자 누워 그 소리에 젖는다.  숨죽이고 기다리던 누군가  툭, 운다.  한 걸음 경계 너머 저 바다  한 생 버려져 녹이 슨 저 괄호   장마가 지나간 골목 풀벌레들 울고  풀벌레..

몽돌/ 김현숙

몽돌     김현숙    물은 천리를 흘렀는데  그대 한 자리에 앉아  천 날의 물결을 깎았는가  가파른 주의주장도 누그러뜨리고  날 선 입도 잠잠해졌구나    가끔 자갈거리며  해소기침 끓는 소리  수 만 바람과 부대끼었나  엎어지고 깨진  파도의 집채 가라앉아서    -전문-  ---------------------- * 『한국시학』 2024  여름(70)호 에서 * 김현숙/ 1982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쓸쓸한 날의 일』『꽃보라의 기별』『물이 켜는 시간의 빛』『소리 날아오르다』『아들의 바다』외 다수

사람이 위안이다/ 박재화

사람이 위안이다      박재화    살다보면   사람에 무너지는 날 있다  사람에 다치는 날 있다   그런 날엔  혼자서 산을 오른다  해거름까지 오른다   오르다 보면  작은 멧새 무리 언덕을 넘나든다  그 바람에 들찔레 흔들리고  개미 떼의 나들이도 보인다   그림자 없이 내려오는 숲속  순한 짐승들  어깨 비비는 소리 가득하여    사람에 무너지는 날에도  사람은 그립고  사람에 다치는 날에도  사람은 위안이다    -전문(화보 & p. 78-79)   ---------------------- * 『한국시학』 2024  여름(70)호 에서 *  박재화/ 1951년 충북 출생, 1984년 『현대문학』에 「도시의 말」연작으로 2회 추천완료 등단, 시집『도시의 말』『우리 깊은 세상』『전갈의 노래』『먼..

새 2/ 최금녀

새 2     최금녀    새를 모았다  새의 어깨에  감정이 돋아날 때까지 닦아준다   감정이 살아난 새들은 이따금씩  눈을 감은 물고기 몇 마리  맹고나무 숲 노을 한 묶음  양말을 신은 바오바브나무 발가락 몇 개도 물고 온다   흔들릴 때마다  나는 새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아픈 과거나 고향을 열어보지 않는다   세어보지 않아도  기억하지 않아도  새들의 이름은 새이다   지친 어깨를   굳어버린 슬픔을  부드러운 헝겊으로 닦아준다   이름을 불러준다.    -전문(p. 132)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최금녀/ 1998년『문예운동』으로 등단, 시집『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외 6권, 활판시선집『한 줄, 혹은 두 줄』 외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