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171

나를 찾아서 외 1편/ 김육수

나를 찾아서 외 1편      김육수    왕산골행 941번 첫차가 오면,  옷 위에 올라앉은 어둠과 오른다  차창에 새겨진 무표정한 얼굴  낯설어 보이지만 어젯밤 죽었던 내 얼굴   고개 숙인 논길을 지나  조팝나무 안내 따라  한적한 왕산골에 배송되는,  밤새 강한 척하다 죽었던 나는  어둠 뚫고  먼저 온 햇살을 포옹한다   대나무 샛길로 가다가  숲 사이로 잠기는 늪  그 늪에 빠져 지난날 죽었던 내가  수많은 나를 바라본다   햇살을 포옹하며 묻혀 있다가  어둠의 단추를 풀고 다시,  다가올 나를 찾아가는 시간들     -전문(p.12)        --------------------------------      수산시장 회 센터    밀려온 바다에 발목 잡힌다  대야에 산소호흡기 달려 있다..

저녁이라는 말들/ 김육수

저녁이라는 말들     김육수    숲속에 걸친 빛들은 물러가고  어둠이 채워지는 산길로  저녁이라는 말들이 길게 드리운다   산모퉁이에 자그마한 집 굴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환했던 낮과 저녁 사이에 태어난 말들,  그 수련한 말들은 허공의 빈 의자를 찾아간다   산 그림자가 지워진 저녁 하늘  풀벌레 울음소리가  오두막에 쉬고 있는  한낮의 말들을 지우고  저녁이라는 말들이 울고 있다   어깨를 다독이는 달빛을 품고  소로小路로 가는 상처 난 영혼들  걷는 발걸음 소리조차 부담스러워  바람길 따라 침묵 속에 간다   아직은 밤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물렁물렁한 저녁의 말들이  허공의 빈 의자를 채우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김육수의 첫 시집 시편들을 독서하면서 느끼는 건..

크리스마스의 악몽/ 이은수

크리스마스의 악몽      이은수    빨강의 유혹은 설렌다. 상자 안의 붉은 하트가 용수철로 튀어나오듯   욕망이 터진다. 자바섬에 있는 태평양 몰에는 산타와 순록이 뜨거운 하늘을 날고  매직 트리가 반짝인다. 스키가 허깨비처럼 서 있는 집. 스티로폼 눈이 대롱거리는  쇼윈도에 가짜 크리스마스 영광이 꿈틀댄다.  달콤한 캐롤을 들으며 노상의 리어카들에는 하얀 플라스틱 위 나시고랭이 휘휘거리고 망고 주스가 늙어가는 옆에서 꼬치들이 연기를 피우며 익어가고 있다.  맨발로 도로 웅덩이 물을 철벅이며 아이들은 주머니의 동전을 세어본다.  까만 분꽃 씨 같은 눈동자가 세상을 눈치채며 말한다. 절묘하게 스키가 산 위에서  내려오는 설산에 갈 거야. 어디로 가는 거니? 땅에 평화는 서슴없이 속내를 밤새 드러내고 눈..

골방의 진화/ 최규리

골방의 진화       최규리    송진 냄새가 납니다.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얼마나 엎드려 있었는지 모릅니다. 바다 이끼처럼 고요한 날에도 가끔은 피비린내가 났어요.  물고 뜯는 싸움은 전생이나 이생이나 아주 흔한 일이죠. 동네 싸움 구경하듯 놀라지도 않습니다. 바닥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먹이를 주워 먹으면 되지만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들소처럼 뛰어다니고 싶어요. 검은 얼룩무늬를 하고 허벅지 근육을  자랑하는 표범도 좋겠죠.   아침이라고 다를 건 없어요. 깊은 심해에는 소문도 없죠. 고요히 물살에 몸을 맡기면 근육이 필요 없어요. 계절마다 꽃을 피워야 하는 의무감도 없고요. 흙을 위해 바람을 데려오고 비를 뿌려야 하는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죠.   소나무였는지 모릅니다. 등에 붙은 단단한 껍..

지금, 베를린/ 정선

지금, 베를린      정선    연두가 수의를 벗었다   옥죄다,  를 생각하면 자꾸만 치밀어  빨간 문어가 돼   연두는 곁에 두고 싶은 안식  지난해 몰래 숨겨 놓은 안반데기에 연두가 꽃핀다   주머니엔 부정의 돌멩이들이 늘어 가고  식은 사랑은 꽃으로도 데워지지 않지   하나 연두는 질리지 않는 얼굴   맞은편 좌석에서 볼풍선을 불어넣는 중년의 오후  헤어지기 싫어 쪽쪽거리는 연인의 오후  오후는 서글프다  그 푸르름 위로 느닷없는 우박의 화(火)   깨진 얼굴에 거울을 비치면 위로가 되는 밤  생각의 벽돌로 견고한 성을 쌓는 안온한 밤   그런 밤은 순치의 시간  슬픈 자기양육의 시간   천사는 흑백 베를린을 사랑했지  화해의 키스로 베를린  희망을 악수하는 베를린  젖은 솜이불을 덮고도 화려한..

공동저자/ 김화순

공동저자     김화순    패션의 완성은 멋진 신발이라면서  그 안의 발은 제대로 챙겨준 적 없지   나의 부속으로  살아온 너는  늘 나를 눈부신 곳으로 데려가곤 했는데   얼마나 오래 참고 걸어온 걸까   골퍼의 볼품없는 발이나 발레리나의 끔찍한 발가락은  무대에서 꽃으로 피어날 때 숨죽이고 있었지   가끔 통증으로 말 걸어오는 너는  달의 뒷면처럼 묵묵히 나의 앞길을 비춰주었지   내가 이룬 모든 것은 너와의 협업  환한 웃음 뒤에는 고독한 너의 행보가 있지   나는 네가 써 내려간 기억의 변천사  너는 내 책의 공동저자야     -전문(p. 95)  ----------------------- * 『다층』 2024-여름(102)호 > 에서 * 김화순/ 2004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구름출..

대나무/ 조서정

대나무     조서정    사군자 중 막내로 이름을 올렸으나  한 번도 군자로 살아본 적 없으며  군자로 살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소이다   목재로도 쓸 수 없어 나무에서도 퇴짜 맞고  풀에도 끼지 못하는  이도저도 아닌 양다리외다   낭창거리며 살아온 선비들이 덮어씌운  충절과 절개의 이미지 덕에  바람에 흔들리며 풍류를 즐기며 살아온  낭만파이외다   텅 빈 뼈대 하나로 흐느적거리면서도  쉬이 꽃을 내어주지 않는 차가운 가슴으로  바람의 옹이로 버텨온  천하의 한량이외다     -전문(p. 104) ----------------------- * 『다층』 2024-여름(102)호 > 에서 * 조서정/ 2006년 『詩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모서리를 접다』『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나라고 할까』, 산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4      정숙자    눈뜨고 있지만 바라볼 데가 없습니다. 겨우 일어선 갈비뼈들이 차례도 없이 무너지는데, 당신 말고는 그 누구도 난파에 휩쓸리는 태양의 파산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1990. 10. 24.)                  “한 사회가 썩을 때는 시인이 맨 나중에 썩는다.  ∴ 시인이 썩었다면 그 사회는 다 썩은 것이다.”   저의 등단 초기, 『문학정신』 사무실에 근무ᄒᆞ셨던 이추림 시인(1933-1997, 64세)께서 장차 시인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 예의와 평생 두고 새겨야 할 덕목을 넌지시 일러주시곤 했는데요.   어제는 님의 친필 ᄉᆞ인이 든 시집 열두 권을 수북이 꺼내 놓고 망연히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요즘 들어 저 깊은 말씀이 자주 떠오르고..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4/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4      정숙자    눈뜨고 있지만 바라볼 데가 없습니다. 겨우 일어선 갈비뼈들이 차례도 없이 무너지는데, 당신 말고는 그 누구도 난파에 휩쓸리는 태양의 파산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1990. 10. 24.)                  “한 사회가 썩을 때는 시인이 맨 나중에 썩는다.   ∴ 시인이 썩었다면 그 사회는 다 썩은 것이다.”   저의 등단 초기, 『문학정신』 사무실에 근무ᄒᆞ셨던 이추림 시인(1933-1997, 64세)께서 장차 시인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 예의와 평생 두고 새겨야 할 덕목을 넌지시 일러주시곤 했는데요.   어제는 님의 친필 ᄉᆞ인이 든 시집 열두 권을 수북이 꺼내 놓고 망연히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요즘 들어 저 깊은 말씀이 자주 떠오르..

수도암 별사/ 이상구

수도암 별사      이상구    바람의 법문 소리 귀담아 들은 걸까  굴참나무 우듬지 하얗게 반짝인다   늘 푸른 겨우살이들  하안거 속에 든 날   인현왕후 탑돌이 오랫동안 생각했나  천년을 기다리다 말라버린 이끼 안고   산문 밖 수많은 풀꽃  은은하게 웃는다   하산한 산신령이 손 모아 합장한 듯  구천의 허공 속에 흐르는 구름 삼켜   날아온 참매미 한 마리  화엄경을 외운다    -전문(p. 79) ----------------------- * 『다층』 2024-여름(102)호 > 에서 * 이상구/ 2016년『월간문학』으로 등단, 2021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