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171

내 안에 외 1편/ 임솔내

내 안에 외 1편     임솔내    내 안에 사람을 들인다는 거  내 안에 그대라는 강물이 흐른다는 거  날마다 흐벅진 산山이 내 안에  자라고 있다는 거  '잘 살자' '잘 살자' 자꾸만  말 걸어 온다는 거  흥건하고  아늑하고  아득하다는 거   산다는 건 견디기도 해야 하는 거  그대의 찬 손 내 안에 쥐면  떨어뜨릴 수도 없는 눈물이  고인다는 거  꺼내 보이기도 벅찬 내 마음  정갈한 삶 위에  곱다시 얹어본다는 거   저 아련한 거처  내가 할 수 있는 위로가 없어  잊을 수도 놓을 수도 없어  나도 그럴 거라는 거   허나,  그대라는 편질 읽으면  왜 이리 울어지는가  -전문(p. 시 32-33, QR코드 & 사진)      -------------------    파란 나비    "하..

하이바이, 19(+해설)/ 임솔내

하이바이, 19      임솔내    섬처럼 사느라  엄마를 내다버린 곳에 가지 못했다  허연 칠순의 아들이 구순의 어미를  음압 병동으로 옮기는 걸  멀리서 바라만 보는 모습 TV에 뜬다   꿈처럼 자꾸 도망가라 멀어져라  혼밥으로도 이미 아득해졌을 걸  헤지고 굽어진 길 어귀에서  서로 기다릴 텐데   눈에서조차 멀어지면  어쩌자고  꽃은 자꾸 떠서 지고 있는데   이제 가야지  엄마 버린 곳     -전문-   해설> 한 문장: 화자는 어머니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자기가 "엄마를 내다버린" 것으로 스스로 간주하고 그 책임을 자신에게 묻고 있다. 즉 화자는 어머니로부터 "도망가라 멀어져라" 떨어져 나온 것을 어머니를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 어머니는 "..

거미줄 외 1편/ 박재화

거미줄 외 1편      박재화    밤 산책로 얼마쯤 어둠에 잠겼다가 저쪽 아파트 불빛 따라 트이기도 합니다 날마다 찾지만 같은 듯 다른 공기 숲냄새 살아 있어 좋습니다 다만 얼굴 스치고 떨어지는 거미줄에 가슴 싸아합니다 그의 무척이나 힘들었을 노역을 이리 쉬 허물다니···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그러면서 한편 의아합니다 여기 무슨 날것들 있다고 거미줄 치나? 아파트 들어서면 사람들 몰려오면 얼른 물러나야 하지 않나? 사람 무서운 줄 모르다니 참 바보 같습니다 어구나 그처럼 하릴없는 기다림이라니! 이젠 기다리지만 말고 여섯뿔가시거미처럼 먹이 찾아 나서라 권하고픈 밤입니다    꽤 오래 무시무시한 소리에 먼지 대단하더니 숲이 사라졌습니다 때없이 사람들 나타나고 밤도 예같지 않습니다 조금 남은 나무들 풀들 ..

단체 카카오톡 외 1편/ 박재화

단체 카카오톡 외 1편         난중일기外史 · 2      박재화    한밤중 달려드는 까톡까톡 소리  단체 카카오톡을 나올 수도 없고  휴대전화를 진동 처리하면서  충무공의 수고를 생각는다  계사년* 전란 속 여름날  같은 내용의 편지를  접반사, 도원소, 순변사, 순찰사, 병사, 방어사 등  여섯 군데나 보내야 했던 충무공  의관을 정제하고  먹물 듬뿍 찍어 정성껏 보고서를 썼음  더러는 고쳐 쓰고 처음부터 다시 썼음  비 내리는 운주당運籌堂**의 충무공을     -전문(p. 48)    * 왜인들이 쳐들어 왔던 임진년의 다음해, 1593년   ** 충무공의 서재 겸 집무 공간으로, 합동 작전계획의 산실       -------------------------------------    아프지..

황금빛 나무를 그리다/ 정영숙

황금빛 나무를 그리다      정영숙    희부연 하늘 등에 지고  허공에 검은 점으로 떠 있는 황조롱이  어제도 들렸고 그제도 들렸던  노랫소리 들리지 않는다   흐린 하늘에 내 귀가 물든 것인가  황사 바람이 새의 목젖에 모래알을 가득 채운 것인가  지하에 누워 있는 시황제의 영靈이  지상에 다시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인가   눈빛 나누며 마주 볼 작은 공간도 없이  허공을 떠도는 저 황조롱이  혼돈의 아우성 속  차라리 조롱 속에 갇히고 싶다   물 한 모금, 조롱 속에 넣어줄 손이 없어  순수의식은 익사한다*   푸른 하늘을 날 수 없는 시대  한 평 반의 갇힌 방에서  붉은 심장을 갈아  우리 모두 사랑 노래 부를 수 있는  황금빛 나무를 그린다     -전문(p. 118-119)     * 순수..

미워지는 밤/ 이미산

미워지는 밤      이미산    잠들기 전 꺼내보는 얼굴 하나   여긴 종일 비가 왔어요 당신도 비를 맞았나요   어두워지면 당신을 불러보죠 그곳에 어울리는 표정으로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생의 매듭이 된 희미한 당신   미소로 시작된 우리의 처음이 있었고   미소로 주고받은 뜨거운 질문이 있었고   질문을 따라 간 낯선 동굴 실패를 걸어놓고 사랑이라는 게임을 하고   수없이 들락거렸죠 물방울 뚝뚝 떨어졌죠 나는 어제 내린 빗물이라 하고 당신은 아담과 이브의 눈물이라 하고   신은 언제나 동굴의 자세로 나를 안아주었죠   그리하여 우리는 각자의 동굴 이후라는 그리움   이제는 혼자 걷고 있죠 우리의 비 수억 년 떨어지는 그 물방울   한때 미치도록 궁금했던 모든 당신 자꾸만 희미해지는   이런 내..

이름 없는 것들 외 1편/ 박종국

이름 없는 것들 외 1편      박종국    아무도 모르게 오고 간다  한가하게 길바닥에 누워 있는 세월  흔들기도 하고 발길로 차기도 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계절처럼 오고 가면서  허약한 놈 있으면 잡아먹고  나머지는 부려 먹는  무밭의 벌판을 만들어 내는   이름없는 것들은   제 삶을 물어뜯게 하는  천하의 악종 같이 두려움을 안겨 주면서   우리들 안과 바깥에 꽉 차 있다   어디든 빈틈없이 메우고 있는 야석같이  젖꼭지를 물리고 있는 어머니 마음같이  주먹짏고 치대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그늘 없는 삶의 길을 오고 간다   어디쯤 가야   너를 울리고 나를 울리면서 오가 가는  그림자 같은 이야기라도 들을 수는 있을까  아, 하고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전문(84-85)  ..

병실에서 2/ 박종국

병실에서 2     박종국    항암 혈관주사를 맞고 있는  방바닥이며 천장  나를 둘러싼 광장이  현실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몽롱한 의식의 흐름만이  이리저리 나부대는   발끝에 밟히는  목숨 있는 모든 것의 숨소리  살아 있는 소리  억겁의 소리 그리고 빛깔이  살살 스며드는 소리  시간을 앞질러 가는 불안 속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살아야지  살아야지 하고  울고 웃던 지난날들이  달빛 받은 강물에 일렁이는  그 쓸쓸함같이  밤하늘 별을 헤아리게 하는   황혼의 그림자를 깔고 누운  짙고 짙은 삶,  목숨에서 우러난 목마름이  불쑥불쑥 나타나 깜박깜박하는   피리 소리 같은 샛바람 소리를 듣는  나를 받아 내는 그림자  지혜로운 어둠이 풀리고 부서지고  흩어지는 달빛 같다   사는 동안..

김밝은_자연의 숨소리를 들으며 시를···집(부분)/ 스트로마톨라이트 : 이건청

스트로마톨라이트      이건청    인천시 서청도 부남 서편 해안  25억 년 전 지층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화석이 있다.  박테리아, 스트로마톨라이트  원시 생명으로 변이되어가던 때의  섬유질 남조류藍藻類로  물속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하는데  천둥, 번개 몇 억 전압 방전 에너지 속에서  생명유전자를 처음으로 복제하기도 했다는데,   이 화석의 채집자는  군집한 박테리아가 분비한 점액질이  바위에 흔적을 남긴 것이라 적고 있다.*   세균과 섬유식물 중간쯤의 저 것  바위에 거뭇거뭇 번져 있는 저 것  25억 년, 원생대  스트로마톨라이트가 뿜어낸 분비물이 굳은 화석   물질 속에서  생명의 시작을 풀어내는  그리운 점액질,  남조류가 남조류를 껴안은 채  거뭇거뭇 화석으로 굳은  스트로마톨라..

김밝은_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족이 함께인 집(부분)/ 어이! 달 : 신달자

어이! 달     신달자    어떻게 여길 알았니?  북촌에서 수서에서  함께 손 잡고 걸었던 시절 지나고  소식 없이 여기 경기도 심곡동으로 숨었는데  어찌 알고 깊은 골 산그늘로 찾아오다니······    아무개 남자보다 네가 더 세심하구나  눈웃음 슬쩍 옆구리에 찔러 넣던  신사보다 네가 더 치밀하구나  늦은 밤 환한 얼굴로 이 인능산 발밑을 찾아오다니······    하긴 북촌 골목길에서 우리 속을 털었지  누구에게도 닫았던 마음을 열었지  내 등을 문지르며 달래던 벗이여   오늘은 잠시라도 하늘 터를 벗어나  내 식탁에서 아껴 둔 와인 한 잔 나누게  가장 아끼는 안주를 아낌없이 내놓겠네  마음 꽃 한 다발로 빈 의자를 채워주길 바라네  어이! 달!     -전문,『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