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171

수선화 편지 · 34 외 1편/ 상희구

수선화 편지 · 34 외 1편        사도 바울의 사랑歌      상희구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저 유명한 사도 ..

수선화 편지 · 32/ 상희구

수선화 편지 · 32         시멘트 콘크리트 육교 난간을 비집고 솟아오른 민들레 한 송이      상희구    무심코 육교 계단을 황급히 오르는데 시멘트 콘크리트 육교 난간 틈새를 비집고 솟아오른 가녀린 민들레꽃 한 송이를 만났습니다. 척박한 환경이라 그런지 피다만 아기 꽃송이는 기진맥진 그대로였습니다. 갑자기 한 생명에 대한 거룩한 외경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급히 생수병을 꺼내, 한 모금 불을 아기 민들레 조그마한 얼굴에 손바닥으로 살짝 머금어주었습니다.   "잘 커려무나, 아기야."      -전문-   후기> 타고난 예술가 누에 이야기(전문)_저자  누에는 누에나방과에 속하는 누에나방의 유충이다. 하등동물에 속하는 곤충이다 보니,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아 생김새는 초현질적으로 생겼다...

가리비의 여행/ 이명

가리비의 여행      이명    그물에 들었어  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  태어난다는 것이 기적이고 삶이 신화일 테지만  모래 속을 파고드는 일상이 지겹다 느껴질 무렵  가볍게 날아올랐어  트랩이라 생각하며 어디까지 날아갈지 모르지만  비상의 시간이야  신은 있다고 믿으니까  그 물속으로 행운이 찾아온 거지  직성이 풀렸다고나 할까  언젠가 신선들 그림에서 봐둔 남극노인성을 찾아갈 거야  머리 꼭대기가 위로 솟은 노인 말이야  그렇다고 장수할 생각은 없어  행운이 있을 거야  신앙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니까  길을 찾아 떠나는 거지  그물 밖으로     -전문(p. 92)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이명/ 2010년『문학과 창..

제의로부터 출발해 그것을 대체해 나간 비극은/ 양순모

제의로부터 출발해 그것을 대체해 나간 비극은      양순모/ 문학평론가    제의로부터 출발해 그것을 대체해 나간 비극은 희생 제의와 공통의 전제를 공유하지만, 비극은 그야말로 문학답게, 종교와 구별되는 문학만의 분명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신들의 악마적이고 파괴적인 양태에 대한 경험은 '비극'과 '제의' 모두"에 공통적인 것으로, 다만 희생 제의는 '종교'적인 신을 자비로운 신으로 전환, 결국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이 악마성과 파괴성을 "회피"하게끔 만든다. 또한 희생 제의는 당면한 폭력적 상황과 관련해 인간의 모든 권리와 책임을 신에게 양도함으로써, 철저히 "종교"적인 태도로서 당대의 악마적이고도 파괴적인 국면을 통화해 나간다. (해설, p. 147) ---------------------..

한 줄 노트 2024.07.03

파종 외 1편/ 정우신

파종 외 1편     정우신    내 머리에 꽃 피었는지?   소각장에서 말했지  어설피 때리지 말고 완전히 죽이라고  장난을 장난으로 끝내면  내가 죽을 거라고   너의 판단은 늘 현명했던 것 같아   친구야 난 그 시절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후퇴한 듯해   팬지에 검은자를 흘리고 간 것이  난 너라고 믿는다  마음이 약한 네가 마음이 더 약한 나에게  들려줬던 말들   계속 맞다 보면 주먹이  검은 원으로 보이는데  그럴 땐 더 움츠려서  점이나 씨앗이 되라고   가볍게  더욱 가볍게  치솟으라고   친구야 넌 똑똑하니까  답을 줄 수 있지?   저 쥐새끼 같은 눈알을 어디에 심어야 할지 말야      -전문(p. 100-101)    ------------------    일용직..

미분과 달리기/ 정우신

미분과 달리기      정우신    바람의 얼굴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봅니다   염소가 발굽을 긁고 있네요   지푸라기를 보다가  콧김이 느껴져  뺨을 긁었습니다   트랙을 달리다 보면  앞니가 시리고  오른쪽 무릎이 절룩입니다   신발 끈이 풀리면 기분이 좋습니다  바닥을 자세히 볼 수 있으니까요   금이 간 곳을 한참  들여다보면   개미는 보이지 않고  누군가 술에 취해  골목을 헤매고 있습니다   날벌레를 머금은  가로등  내 허벅지로 퍼지고   뒤를 보지 않고 달리면  지붕 옆으로 무지개가 놓입니다   나는 지금 트랙을 비집고  자라는 풀   내가 흔들리면  염소가 다가옵니다   염소는 트랙에서  들판을 보고  들판은 별을 복사합니다   개구리는 별과 별이  부딪치는 소리를 냅니다   누군가..

천수답/ 윤경재

천수답     윤경재    카메라를 메고 다닐 때  나는 천수답이 되는 거였다  햇살이 소나기로 쏟아져 내려도  나의 얄팍한 감광지는  찰나 한 조각만을 겨우 건질 뿐  그와 나 사이의 프레이밍  아무리 절묘하게 구도를 이리저리 잡아도  없는 것을 찍을 재주는 없다  나는 천수답, 주는 것만 받아먹을 뿐  인공강우는 실험실에서만 가능한 일  돌아와 초록빛 여행을 정리하면서  그때의 향기와 마음이 못내 아쉬워  또다시 떠남을 떠올린다  빛의 진심은 다 보여주는 데 있지 않고  한 꺼풀 감추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전문(p. 88)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윤경재/ 2007년『만다라 문학』 & 2008년『문예사조』로 등단. ..

조은설_시시다반사(詩詩茶飯事)를 노래하다(전문)/ 다반사 : 서상만

다반사          1 考      서상만    새벽 눈 뜨자마자 밤새 저질러놓은 詩抄를 다시 훑어보는 일, 뭐 推敲란 말 너무 거창하고 우선 시의 詩的 동력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시어는 새로운지 너무 관념적 시어는 없는지 너무 단출해서 반편인지 어조는 낡지 않았는지 횡설수설 장광설로 길어빠진 시가 아닌지 산문시에도 운율은 살려야 등등을 살피고 아, 이거 영 아니다 싶으면 즉시 날려버리고, 그래도 좀 가져갈 구석이 있으면 고이 숙성시킨 후 다시 꺼내본다 이 나이토록 이렇게 시시 다반사다    -전문-   ▣ 시시다반사詩詩多飯事를 노래하다(전문)_ 조은설/ 시인  '글은 곧 그 사람'이라고 한다.   일면식이 없어도, 글 속에 오롯이 담긴 생각과 사상만으로도 그의 사람됨을 추론해 낼 여지가 다분하기..

디 엔 에이(DNA)/신원철

DNA     신원철    고기를 구워 이빨로 뜯어먹다가  혀와 손가락으로 뼈 속살까지 빼먹다가  동굴의 선조들,  호호 불며 나무꼬쟁이로 후벼내다가   그게 자꾸 진화해서 두 개의 젓가락  특히 매끈한 쇠젓가락   그 젓가락질 참 예술이지  엄지와 검지 사이에 그냥 놓인 것 같지만  손가락보다 오히려  능숙하게 잔치국수는 한입에 빨아들이고  라면 가락도 둘둘 말아서 건져 먹다가  미끈대는 도토리묵마저   그게 때때로 막걸리 술상 두드리며 박자마저 기막히게 맞추더니  근자에는 춤과 음악으로 세계를 붕붕 띄우고   쌀알의 몇 분지 일 반도체 칩까지 정확히 집어  딱딱 꽂아 넣는데  어떤 나라도 당할 재주가 없다는군   한국의 아기들은 엄마 배 속에서 젓가락 리듬을 타고  손가락 운동부터 시작한다니     ..

기분의 탄생-가장자리 외 1편/ 하린

기분의 탄생-가장자리 외 1편      하린    헌책들이 쌓여있는 가게  이것을 세상의 모든 가장자리라고 해 두자   무너질 것처럼 쌓여 있으니  가장자리가 가장자리에게 보내는 위안이라고 해 두자   결과는 기록이 되고 기록은 전진한다   가장 가장자리다운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왜 그렇게 문장들은 치열했던 것일까, 후회한다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도  아파하는 것도 가장자리의 특권이지만  소멸보다는 자멸에 가깝다   기록은 불현듯 속도를 잊는다  겨울에 문을 닫고  여름에도 문을 닫는 중고 서점   주인은 지금 새 주인을 찾는 중이다  책을 살 사람이 아니라  책과 함께 늙어 갈 사람이다   책방 임대 중이  책방 정리 중으로 바뀌고  다시 책 가져갈 사람 찾아요로 바뀌는 동안  가장자리는 니힐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