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김요섭_ 그 허망함에도 불구하고(발췌)/ 장담은 허망하더라 : 유병록

검지 정숙자 2019. 10. 11. 22:58

 

 

    장담은 허망하더라

 

    유병록

 

 

  다짐은 허망하더라

  너를 잊지 않겠다 장담하였는데

 

  세월 가더라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하고 휴가도 가더라 공과금 고지서가 날아와 우체통에 꽂히고 전세 계약도 끝이 나고

 

  살아가더라 세계는 멸망하지도 않고 나는 폐인이 되지도 못했더라

  웃기도 하더라 새 차를 살까 이사를 갈까 요즘에는 어디 재밌는 책이나 영화가 없을까 찾기도 하더라

 

  사람은 숨이 끊어질 때가 아니라

  기억에서 사라질 때 비로소 죽는 거라는 말

  자꾸 새겨도

 

  돌아보면 너를 기억하지 않고 지나는 하루도 있더라 하루는 이틀이 되고 이틀은 사흘 나흘이 되더라

 

  너는 나타나더라

  슬쩍 나타나서 우리 함께한 시절을 떠올리더라 나를 꾸짖는 모습은 아니더라

 

  우리 함께한 세월은 그렇게 하루하루 멀어지고

 

  장담은 허망하더라

  허망조차 허망하더라   

     -전문-

 

 

   ▶ 그 허망함에도 불구하고(발췌)_ 김요섭/ 문학평론가

   너를 잊지 않겠다던 시인의 다짐을 흔들어대는 것은 어깨 위의 죽음도 지구의 중력도 아니다. 매달마다 우체통에 꽂히는 공과금 고지서와 심심해진 날이면 재미있다며 찾게 되는 책이나 영화다. 너를 잃은 뒤에도 살아야 하는 일상은 하루는 매일의 출퇴근과 끝나가는 전세 계약, 통장에 한 줄 한 줄 쌓이는 공과금 납부 내역 때문에 고단함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나 일상은 한 방향으로 기울고 기울다 쓰러지는 대신에 또 다른 날에는 반대쪽으로 무게가 실린다. 새 차를 살지, 새로 이사를 할지, 좋아하는 영화와 책을 보며 웃기도 하며 고단함으로 기울던 일상은 다시 균형을 찾는다. 일상은 고단함과 기쁨이 반복될 뿐 파국을 향해 가라앉지 않는다. "세계는 멸망하지도 않고 나는 폐인이 되지도 못"하게 하는 일상의 항상성, 기울어 가던 하루를 반대편에서 누르는 그 힘 때문에 시인이 품고 있던 너의 기억 전부를 쏟아버리지 못하지만, 점차 줄어드는 기억에 "너를 기억하지 않고 지나는 하루"는 "이틀이 되고 이틀은 사흘 나흘이 되"어 간다. 그렇게 너와 시인이 함께 했던 세월은 세계가 멸망하듯 갑자기 사라지는 대신에 하루하루 멀어지기만 한다. 그렇게 기우뚱거리면서도 평행상태를 유지하는 일상 앞에 "장담은 허망하"고 그 "허망조차 허망하"기만 하다./ 망가지지도 망하지도 않고 잔잔한 바다 위의 배처럼 잠시 기울어도 이내 반대편으로 다시 기울면서 끝나지도 않을 다음 하루로 넘어가기만 하는 일상은 평온하게 너의 기억을 지운다. 너를 잃은 상실과 그 상실 위에 쓴 다짐은 그 일상의 평행을 깨뜨릴 만큼 높게 쌓이지도 못한다. 그 상실의 감각이 날카롭게 솟아나지 못하는 까닭은 그 격렬한 마음을 무언가가 계속 집어삼키기 때문이다.(p. 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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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2019-9월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작품론> 에서

  * 유병록/ 2010년 《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 김요섭/ 문학평론가, 2015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문학웹진 『과자』를 발행하는 문학동인 <과자당>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