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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류소설, 라이트 노블, 테크노 스릴러/ 김성곤(金聖坤)

검지 정숙자 2016. 11. 3. 01:51

 

 

『문학사상』2016-11월호/ 연재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문예사조 19회

 

 

    중류소설, 라이트 노블, 테크노 스릴러

 

   김성곤(金聖坤)/ 한국문학번역원장, 서울대 명예교수

 

 

  1. 레슬리 피들러의 중류소설 이론

  문학과 예술을 고급문화와 정전에 속하는 지고하고 순수한 것으로 보았던 모더니즘의 귀족주의와 엄숙주의를 비판하며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의 일상화와 문학의 대중화를 지향하고 옹호했다. 그 결과, 섭 장르 소설과 중류소설이 부상했고 라이트 노블과 테크노 스릴러가 생겨나게 되었다.

  '중류소설(middlebrow literature)'을 주창한 문학평론가는 레슬리 피들러(Leslic Fiedler)였다. 1960년 초에 처음으로 모더니즘 계열의 고급문학과 '소설의 죽음(The Death of the Novel)'을 선언하고, 대중문화시대의 도래를 천명했던 피들러는 시대를 앞서간 진정한 선각자였다.컬러텔레비전이 집집마다 보급되고, 사람들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드라마에 빠져들자, 피들러는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피네간의 경야』같은, 대학 강의실에서나 읽는 난해한 예술소설은 이제 죽었다고 보았다. 그 대신,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적이고 유익한 중류소설만이 전자매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보았다. 피들러는 대표적인 중류소설로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킨 『엉클 톰스 캐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반지의 제왕』, 『앵무새 죽이기』, 『 갈매기의 꿈』같은 작품들을 예로 들었으며, 전자매체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작가들은 중류소설을 써야한다고 주창했다. 피들러는, 위 중류소설을 읽은 후 감동을 받아 인생에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있어도 난해한 예술소설 『율리시즈』를 읽고 그렇게 된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각주가 원작만큼이나 길게 붙어있는 난해한 예술소설은 더 이상 아무도 읽지 않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일 피들러가 살았다면, 전 세계 사람들을 감동시킨 『해리 포터』도 중류소설의 좋은 예로 꼽았을 것이다. 피들러가 말하는 중류소설은 엘리트를 위한 난해한 고급 예술소설도 아니고, 저급한 통속소설도 아닌,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재미와 유익을 둘 다 갖춘 바람직한 소설이다.

  피들러는 자신이 평론가이면서 동시에 SF 소설가여서, 추리소설과 판타지 등, 섭 장르소설을 순수문학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SF나 판타지나 추리소설은 전자매체와도 경쟁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같은 판타지의 가치를 인정했고,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브람 스토커의 『드리큘라』, 스티븐 킹의 『캐리』같은 호러픽션을 옹호했으며, 아서 클릭의 『파운데이션』이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바이센테니얼맨』같은 SF 소설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시리이즈, 또 모리스 루블랑의 『루팽』시리이즈도 전자시대에 경쟁력 있는 문학 장르로 보았다. 만일 피들러가 아직 살아있다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나, 매슈 펄의 『단테 클럽』이나, 제드 루벤펠드의 『살인의 해석』같은 역사추리소설도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았을 것이다.

 

  2. '라이트 노블'과 '칙 릿'

  '라이트 노블(Light Novel)은 '비주얼 노블'처럼 일본에서 시작된 새로운 문학 장르로서, 청소년들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분량과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문고본 사이즈에 삽화가 들어가 있는 소설이다. 오늘날의 전자세대 청소년들은 진지하거나 고통스럽거나 무거운 문학작품은 이제 더 이상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프린트 매체보다는 영상 매체가 훨씬 더 익숙하고, 즐겁고 속도감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문학작품보다 만화나 영화를 더 선호한다. 그림이 들어가고 경쾌하며 짧은 '라이트 노블'은 바로 그런 세대를 위한 소설이다. 만화처럼 가볍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으면서, 동시에 글로 된 문학의 정취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트 노블'은 대개 표지에 삽화가 들어가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만화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라이트 노블'은 일본에서는 1970년부터 시작되었으나, 한국에서는 2000년대 중반에야 수입되었으니,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이는데 동작이 엄청 느린 셈이다. 우리는 또 창의력도 부족해서 안타깝게도 좀처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국내의 '라이트 노블'도 대부분은 일본 것을 번역한 것들이다.

  《조선일보》에 의하면, '라이트 노블'은 일본 전체 문학시장 판매량의 20%를 점유하고 있을 만큼 서점가의 무시 못할 존재가 되었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예스 24의 집계에 의하면, 일반 문학도서의 판매는 해마다 27.5% 가량 감소하고 있는데 반해, '라이트 노블'의 판매량은 해마다 약 14.7%씩 증가하고 있다. 일반 소설을 2천에서 3천 권을 찍어도 쉽게 다 나가지 않는 반면, '라이트 노블'은 1만~2만 권이 쉽게 팔린다고 한다. '라이트 노블'은 스릴러, 호러, 로맨스, 로맨스 코미디 등 다양한 종류의 소설양식으로 출시되고 있는데, 200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시장에서도 출간되기 시작했다. 미국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는 일본의 '라이트 노블'인 『올 유 니드 이스 킬』을 영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이트 노블'과 더불어 떠오르고 있는 새로운 장르가 '칙 릿'이다. '칙 릿'이라는 용어는 여성을 지칭하는 미국속어인 '칙'과 영어로 문학(literature)의 약자인 '릿'의 합성어이다. '칙 릿'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95년 크리스 마자와 제프리 드셀이 편집한 단편선집 『칙 릿: 포스트페미니즘 픽션(Chick Lit: Postfeminist Fiction)』에서이고, 원조가 되는 작품은 1996년 영국작가 헬렌 필딩의 『브리짓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 Diary)』라고 알려져 있다.

  '칙 릿(Chic Lit)은 1990년대 후반에 영미에서 시작되었는데, 주인공은 대도시에 사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싱글 여성이고, 내용은 그녀의 로맨스나 친구관계나 직장생활 등 사소한 일상사에 대한 것이다. 포스트페미니즘과 더불어 급부상한 새로운 장르는 출판계에 돌풍을 일으켜서 '칙 릿'만 전문으로 출간하는 대형출판사의 자회사들도 생겨났다. 유명한 텔레비전 드라마인 <섹스 앤 더 시티>, <필사적인 주부들>, <가십 걸>, <멜로즈 플레이스>, <그레이즈 아나토미> 등도 '칙 릿'을 원작으로 해서 대성공을 거둔 영우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는 원래 여성의 로맨스를 다룬 인기 소설인 '할리퀸 시리이즈'가 있었는데, '칙 릿'은 그보다 덜 감상적이고 더 세련된 현대적인 감각으로 차가운 도시 여자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칙 릿'의 주인공들은 굳이 한 남자에게만 집착하지 않고, 레즈비언끼리의 관계도 마다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살고 있는 싱글 우먼인 경우가 많다.

 

  3. 테크노 스릴러

  '테크노 스릴러'는 스릴러 소설에 과학기술이나 전쟁/스파이 소설이 가미된 혼종소설이다. 화석에서 공룡의 DNA를 추출해 코스타리카에 쥬라기를 재현해 놓은 인공 공룡서식지에서 컴퓨터에 대한 맹신과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사고가 나는 과정을 추적하고 묘사한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은 대표적인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또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사실을 조작한 NASA의 음모를 폭로한 댄 브라운의 처녀작 『디지털 포트리스』도 베스트셀러 테크노 스릴러이고, 생화학 무기 유출문제를 다룬 넬슨 드밀의 『플럼 아일랜드』도 우명한 테크노 스릴러 중 하나이다. 

  영국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어느 물리학자의 비행』은 해지펀드 투자 알고리즘 VIXAL-4를 개발하여 거부가 된 제네바의 '호프만 투자 테크놀로지'사의 소유주인 미국인 물리학자 알렉산더 호프만이 어느 날 갑자기 전 재산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디지털 시대의 자본주의는 오직 컴퓨터 스크린의 숫자놀음일 뿐이고, 그 숫자가 사라지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다는 허망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테크노스릴러이다. 

  SF 테크노 스릴러인 릭 얀시의 『제5 침공(The Fifth Wave)』은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들이 네 단계의 침공으로 지구인들을 말살한다는 내용이다. 첫 번째 침공에서는 전자기 충격파로 50만 명의 지구인이 죽고, 제2 침공에서는 거대한 쓰나미로 인해 30억이 죽으며, 제3의 침공인 전염병으로는 40억의 인류가 멸망한다. 가장 무서운 네 번째 침공은 외계에서 온 '소리 없는 자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해 인간인 척하며 접근해 인간들을 죽인다. 즉 네 번째 침공에서는 누가 인간이고 누가 '소리 없는 자'들인지 구분할 수가 없고, 인간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그 방법이 가장 무섭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후의 침공인 제5 침공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미스터리 테크노 스릴러인 블레이크 크라우치의 『웨이워드 파인즈』는 사라진 두 명의 동료요원의 행적을 수사하던 비밀정보부 요원인 이산 버크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깨어나 보니 자신이 아이다호 주의 웨이워드 파인스라는 작은 마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실종된 동료요원 중 하나는 죽었고, 또 하나는 그 마을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엄격한 독재자가 지배하고 있는 그 마을에서는 아무도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도 발견한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에 의해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제작된 이 소설은 좀비들이 돌아다닌다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겠다는 핑계로 주민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독재자와 그에 의문을 품는 소수의 저항을 스릴 있게 그리고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히트를 한 또 다른 디스토피아 테크노 스릴러인 제임스 대쉬너의 『메이즈 러너』는 글레이드라는 폐쇄된 장소에 갇힌 20명의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매달 한 명씩 새로운 소년들이 엘리베이터에 실려 끌려오다가, 어느 날 처음으로 테레사라는 소녀가 끌려 들어온다. 글레이드의 밖은 메이즈(미로)인 데다가 그리버스라는 살인 괴물들이 살고 있어서 위험하지만, 이들은 빠져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메이즈로 들어간다. 그러다가 이들은 세상이 태양열에 의해 멸망했고 뇌를 파괴하는 전염병으로 인해 인류가 거의 전멸하게 되어, 항체를 개발하기 위해 면역을 갖고 태어난 자기들이 위키드라는 조직의 실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온갖 고난과 사투 끝에 이들은 구출되지만, 그들을 구출해주는 척 연극을 한 사람들도 사실은 '위키드'에 속한 악당들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 작품과 대쉬너의 후속작인 『메이즈 러너: 더 스코치 트라이얼』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메이즈 러너』의 세 번째 후속작은  『메이즈 러너: 죽음의 치료약』이다.

  버로니타 로스의 과학소설 테크노 스릴러 『다이버전트』는 1. 이타심, 2. 평화, 3. 정직, 4. 용감, 5. 박식의 다섯 분파로 나누어진 미래의 시카고가 배경이다. 여주인공 비어트리스 프라이어는 중앙정부를 맡고 있는 이타심 분파에서 태어났지만, 사실은 체질 상 그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는 다이버전트(일탈)다. 그런데 다이버전트는 정부에서 위협요소로 취급해서 제거하는 문제가 있다. 청소년들은 16세가 되면 적성검사를 통해서 각 분파로 배정되는데, 비어트리스의 검사관 코리 우는 조사 과정에서 비어트리스가 다이버전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 사실을 감춰주고 비어트리스를 이타심 분파로 보낸다. 그러나 그녀가 다이버전트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다이버전트』는 분파에 속해야만 하며, 다양성과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 미래의 통제사회를 통해 현재의 문제점들을 비추어 보여주면서,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있는 테크노 스릴러다. 

 

  3. 좀비소설

  테크노 스릴러의 형태로 최근에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 좀비소설이다. 좀비소설의 시효는 미국작가 리처드 매티슨의 『나는 전설이다』인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은 좀비와 흡혈귀가 뒤섞인 특이한 종이다. 최근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 『워킹 데드』는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전 세계가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해 좀비화된 미래의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리고 있는 맥스 브룩스의 소설 『좀비전쟁( World War Z)』도 유명한 테크노 스릴러이다.

  좀비 영화의 시효는 조지 로메로 감독이 필라델피아에서 만든 인디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대히트를 하자, 로메로 감독은 후속편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새벽>과 <살아있는 시체들의 날>을 만들었고, 최근에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땅>과 <미친 사람들>을 만들었다. 로메로의 영향으로 오늘날 좀비는 많은 영화에 등장하게 되었다. 예컨대 <웨이워드 파인스>에도 울타리 너머에는 좀비와 비슷한 무리들이 살고 있고, 기회만 있으면 마을로 들어오려고 하며, <메이즈 러너>에서도 메이즈에는 좀비 비슷한 괴생명체가 살고 있다. 또 <레지던트 이블>에도 위협적인 좀비들은 도처에서 등장한다. 또한 <23일 후>나 <23주 후>도 좀비의 런던 장악을 그린 유명한 영화들이다. 그렇다면 왜 요즘 이렇게 좀비소설들과 좀비영화들이 성행하고 인기가 있는가? 좀비는 두 가지 면에서 극도의 공포를 자아낸다. 우선 그들에게는 이성과 분별이 없고, 따라서 대화나 타협이 불가능하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어서 쉽게 조종당하며, 무리지어 다니면서 폭력을 행사하고 횡포를 부린다. 좀비들은 오직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하는데, 이는 요즘 정치이데올로기에 의해 세뇌된 사람들의 형태와도 비슷해서 호소력이 있다.

  좀비가 무서운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게 우리의 가족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또는 믿었던 부모나 자녀가 어느 날 갑자기 좀비로 돌변하여 자기를 죽이려 들면,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을 것이다. 과연, 예전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나 지금의 테러 집단의 정치이데올로기가 우리의 배우자나 자녀를 세뇌시키면, 그들은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갑자기 가족도 적으로 돌리고 공격하는데, 그런 변화는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한다. 또 좀비로 변하기 전까지는 도대체 주위의 누가 좀비에게 물려서 감염이 되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도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근본적인 불신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좀비가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어쩌면 좀비보다도 좀비를 사냥하는 인간이 더 사악하고 더 무서울 수도 있다는 점이다. 좀비는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지만, 인간은 이기적이거나 나쁜 생각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좀비를 잔인하게 학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좀비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구실로 동료 인간을 살해하거나 그를 버리고 도망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난해하지 않은 중류소설, 가벼운 라이트 노블, 그리고 추리기법과 과학소설 기법인 뒤섞인 테크노 스릴러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현상이 바람직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런 것에는 우리가 전통적인 소설에서 발견하는 진지함과 무거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노 스릴러의 등장은 간단하게 부인할 수만은 없는 시대적 변화이자 시대적 요구가 되었다.

  그렇다면, 전자세대의 경박함과 얄팍함을 개탄할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장르에 문학의 진지함과 무거움, 그리고 예술성을 최대한 집어넣으려 시도해 보는 것은 바람직할 수도 있다. 부정적인 탄식보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재미있고 부담 없는 내용에 중후하고 좋은 주제가 들어 있어서, 그것을 읽은 우리의 젊은 독자들이 감동을 받고 인간적이 되며 인식의 변화를 경험한다면, 바로 그것이 문학의 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류소설이나 라이트 노블이나 테크노 스릴러를 저급하다고 폄하하는 대신, 그것들의 수준을 높이고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런던과 파리의 젊은이들이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지하철에서 거의 전원이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의 청소년들과는 달라서 감동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고,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지하철에서 휴대폰이 터지지 않기 때문에 책을 본다는 것을 나중에 현지인들에게서 듣고 실소한 적이 있었다. 오늘날 스마트폰은 급속도로 종이책을 대체하고 있다. 그리고 예전에 문학이 하던 일을 이제는 다양한 매체들이 대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요즘 젊은 사람들이 두텁고 난해한 예술소설은 읽지 않지만, 쉽고 재미있고 얇은 책은 읽는다면, 독자들을 필요로 하는 문학도 이제는 변해야만 할 것이다. 전통적인 문예지들이 더 이상 읽히지 않고 팔리지 않자, 민음사의 『릿터(Littor)』나 은행나무의 『악스트(AXT)』같은 고품격 저가의 새로운 형태의 문예지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또 새로운 형태의 문학을 기대하는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물론 전통적인 문학에 익숙한 우리에게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변화는 필연적이다. 평론가 레슬리 피들러는 『종말을 기다리며』에서 '인식의 변화'를 주창했다. 경직된 우리의 인식이 유연해지면, 그래서 '문화적인 변종'을 포용한다면, 문학은 전자시대에도 대중문화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융성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려의 시선과 무거운 심정으로 시대의 변화와 문학의 퇴조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문학의 미래는 앞으로 우리의 인식의 변화와 적극적인 대처에 달려있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

 

    (※ 챕터 넘버의 중복, 원문과 다르지 않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