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형식주의
오민석
역사와 배경_ p.223
러시아 형식주의(Russian Formalism)가 태동한 것은 1915년 창립된 <모스크바 언어학회 Moscow Linguistic Circle>와 1916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시적 언어 연구회>(오포야즈 OPOYAZ)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연구자들에 의해서였다. 모스크바 언어학회를 이끈 대표적인 이론가는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이었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 러시아에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그는 1926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만들어진 <프라하 언어학회 Prague Linguistic Circle>에 가담하면서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에 걸쳐 구조주의 언어학과 문학이론의 발전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시적 언어 연구회>의 주요 멤버들은 쉬클로프스키(Viktor Shklovsky), 에이헨바움(Boris Eikhenbaum), 브리크(Osip Brik), 티니야노프(Yury Tynianov) 등이었다. 토마쉐프스키(Boris Toamashevsky)는 <모스크바 언어학회>와 <시적 언어 연구회> 양쪽에서 활약하였다. <모스크바 언어학회>의 구성원들은 언어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과정에서 시에 관한 논의 즉 '시학(poetics)'을 언어학 연구의 한 영역으로 중시하였다. 특히 일상 언어(practical language)와 구별되는 시적 언어(poetics language)의 특수성을 규명하는 데 이들은 많은 지적 에너지를 투여하였다. <시적 언어 연구회> 역시 시적 언어의 특성, 본질, 일상 언어와 구별되는 시적 언어의 변별적 자질 등을 해명하는 데 전념했다.
러시아 형식주의가 태동할 무렵 러시아는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러시아혁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는 국가 전체를 사회주의 시스템으로 재편하는 작업에 돌입하였고, 그 영향이 문학 연구의 영역에까지 미친 것은 1920년대 중반 이후였다. 이때부터 러시아에는 마르크스 · 레닌주의에 토대한 문학이론 논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이라 불리는 문학이론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1934년 제1차 러시아 작가대회에서 러시아 작가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러시아 사회주의당의 공식 강령으로 채택하게 되는데, 이는 적어도 당분간 러시아에서 형식주의적 논의가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에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의 출발은 마르크스 · 레닌주의였으나, 그것이 하나의 이론으로 형성되던 시기가 주로 레닌 사후(1924년)의 스탈린 치하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것이 가지고 있었던 폐쇄성, 관료성은 일정 정도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러시아 형식주의가 가장 생산적으로 논의를 전개해나간 시기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인 1921~1925년의 아주 짧은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형식주의는 문학을 포함한 '예술 형식의 특수성'에 관한 설명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냈으며, 이 성과는 오늘날까지도 "현대문학이론"의 범주에서 러시아 형식주의를 배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러시아 형식주의가 문학의 '형식'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배경 중의 하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주로 1910년대)까지 진행되었던 상징주의-미래주의(futurism) 사이의 논쟁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고골(Nikolar Gogol), 도스토예프스키(Fedor Dostoevsky), 톨스토이(Lev Tolstoy) 등 리얼리즘 소설문학의 대세에 짓눌려 있던 러시아 시문학은 세기말에 이르러 상징주의 시운동을 통해 부활의 계기를 맞이한다. 상징주의자들은 형식을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내용/형식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문학적 '상징'의 인식론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시는 진실을 현현하는 가장 훌륭한 형식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시는 절대적인 "신비(mystery)"의 수호자였으며, 상징과 운율을 통해 삶의 궁극적 비밀인 '신비'를 현현하는 장치였다. 1910년대 초반 등장한 미래주의는 기존에 존재하던 모든 형태의 낡아빠진 권위와 형식 등을 무차별적으로 거부하고 새롭고도 혁명적인 가치와 형식을 옹호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상징주의자들의 신비주의적 경향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가령 미래주의의 대표 주자 중의 한 명이었던 마야코프스키(Vladimir Mayakovsky)에게 있어서 형식이란 기계와 같은 일종의 물질이었고, 시인의 역할은 물질로서의 새롭고도 혁신적인 '문학 기계-형식'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상징주의-미래주의 논쟁의 막바지에 활동을 시작했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현편으로는 문학을 신비화하려는 상징주의 운동에 반대하면서, 미래주의자들이 보여주었던 형식에 대한 파격적 관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들은 문학의 형식이나 기법이 객관적 '사실(fact)'이라는 점에 주목하였고, 이 '객관적 사실'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길을 모색해나갔던 것이다.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_ p.226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화두는 한마디로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 즉 문학 연구의 대상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문학이론의 연구 대상은 당연히 문학 일반일 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도대체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을 비문학(non-literature)과 구별시켜주는 문학 고유의 자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동의어이다. 에이헨바움의 주장대로, "형식주의자가 원칙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문학을 연구할 것인가가 아니라, 실제로 문학 연구의 주제가 무엇인가이다." 그에 의하면 그들은 문학 연구의 "방법론"에 대해 논쟁하지 않았으며 "특정한 맥락 속에 있는 (문학이라는) 특수한 질료"(괄호는 필자)를 검토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문학과 비문학을 철저히 구분했으며 문학을 문학이게끔 해주는 그 무엇을 규정하고 설명하는 것을 주된 작업으로 삼았다. 이들은 문학을 일상 언어(ordinary practical language)와 구별되는 '특수한 종류의 언어'로 규정하고, 문학작품을 일종의 '객관적 사실', (에이헨바움의 표현을 빌면) "문학적 사실(literary fact)"로 간주했다. 형식주의자들은 이렇게 먼저 연구 대상의 범위를 분명히 한정하고 이 대상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그들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어얼리치(Victor Erlich)의 표현을 빌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의도는 "문학 연구를 심리학, 사회학, 지성사 등 인접 학문으로부터 떼어내어, 문학의 변별적 자질 혹은 상상적 글(문학 imaginative writing)의 고유한 예술적 장치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가령 야콥슨은 문학을 비문학과 구별시켜주는 문학 고유의 자질, 즉 "문학을 문학작품으로 만드는 그 무엇"을 "문학성(literariness)"이라 정의하고, 과학적 문학 연구의 대상이 바로 이 '문학성'임을 분명히 했다. 형식주의자들의 모든 논의는 사실상 이 '문학성'에 대한 다양한 설명에 다름 아니다.
일상 언어와 시적 언어_ p.227
그렇다면 형식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문학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학작품의 내용에서 도출되는가 아니면 형식에서 유래되는가. 형식주의자들은 내용/형식의 이분법을 애써 부정했지만, 문학을 문학답게 만들어주는 것, 즉 문학성의 궁극적 기원을 문학작품의 내용이 아닌 형식에서 찾았다. 가령 신동엽 시인의 「금강」이라는 서사시는 그것이 동학혁명이라는 특정한 '내용'을 다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을 다루는 '방식'이 비문학의 영역들과 다르기 때문에 문학인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동학혁명이라는 내용은 문학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각종 문헌들, 특히 역사적 기록이나 해석의 형태로도 얼마든지 기술될 수 있다. 톨스토이의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사상'은 문학만이 아니라 철학, 종교의 영역에서도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레미제라블』은 프랑스혁명이라는 특정한 내용을 다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역사학이나 문헌학 등과는 다른 특수한 방식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문학인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다루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루는가이고, 이 '어떻게'란 바로 형식의 문제인 것이다. 형식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문학이 비문학과 구별되는 바로 이 지점, 즉 철학, 사회학, 사상사, 역사학 등 다른 분과와 공유되는 영역이 아니라, 문학만의 이 고유한 영역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었다.
형식주의자들이 볼 때, 문학 언어(시적 언어)는 일상 언어와 다른 고유의 변별적 자질을 가지고 있다. 일상 언어는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만, 시적 언어의 기능은 소통이 아니다. 시적 언어는 오히려 소통에 장애를 일으키며 소통의 채널을 교란시킨다. 가령 국화를 국화라고 부른다면 소통에 아무런 장애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처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이라고 부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시적 언어는 이렇게 일상 언어의 규범을 파괴하고 소통을 지연시킨다. 야콥슨의 말대로 시적 언어는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화된 폭력"이다. 시적 언어는 일상 언어라는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이며, 이 일탈을 통해 사물에 대한 지각(perception)을 새롭게 한다.
낯설게 하기_ p.228
쉬클로프스키는 초기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인 에세이, 「기법으로서의 예술(Art as a Technique)」에서 1897년 2월 29일 자 톨스토이의 일기를 인용한다. 톨스토이는 집안을 청소하다가 우연히 한 가구(침상)와 마주치게 되고, 자신이 그 가구의 먼지를 털었는지 털지 않았는지의 여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청소를 하는 일이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어서 거의 무감각 혹은 무의식적인 상태로 그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톨스토이는 "만일 많은 사람들의 그 모든 복잡한 삶들이 무의식적으로 흘러간다면, 그런 삶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지각하지 못하는(느끼지 못하는) 인생은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쉬클로프스키는 반복된 행위로 인해 사물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는 것을 "습관화(habitualization)" 혹은 "자동화(automatization)"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습관화는 우리의 "노동, 옷, 가구, 부인, 전쟁에 대한 공포" 등 모든 것을 무감각의 무덤으로 삼켜버린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아무리 새로운 사람도, 사건도, 자꾸 반복되다 보면 그것을 느낄 수 없게 되고, 그것들을 느낄 수 없을 때,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습관화, 자동화가 사물을 죽이는 바로 이 지점, 이 자리에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술의 기능, 필요가 탄생된다. 쉬클로프스키에 의하면 예술의 존재 이유는 삶에 대해 잃어버린 감각을 희복시켜주는 것이다.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느끼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다시 말해, 너무나 친숙해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물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다. 쉬클로프스키는 예술의 이러한 기능을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혹은 estrangement)"라고 명명한다. 다음은 낯설게 하기에 대한 쉬클로프스키의 그 유명한 정의이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들의 감각을, 통상 알려진 대로가 아니라 지각된 방식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의 기법은 대상들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고, 형식을 난해하게 하는 것이며, 지각(perception)의 난이도와 그것에 걸리는 시간을 증대시키는 것
이다. 왜냐하면 지각의 과정, 그 자체가 미적 목적이고 따라서 그것은 연장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어떤 대상에 부여된 예술적 기교를 경험하는 한 방식이다; 대상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강조는 쉬클로프스키의 것)
이런 의미에서 낯설게 하기는 "사물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각의 자동화로부터 구해내는 것"이고, 예술의 기법이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쉬클로프스키에게 기법은 그가 "대상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때, 여기서 말하는 대상이란, 예술 작품의 재현의 대상인 사물, 현실 등의 소재, 제재,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예술은 우리에게 삶과 사물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나 통찰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이 아닌 다른 영역, 가령 철학이나 사상, 종교 등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술만의 '고유한' 작업은 지식, 정보, 통찰의 제공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새롭게', '낯설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가령 들판의 해바라기는 그 자체 "어떤 대상"일 뿐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의 질료(소재)로서의 의미만을 갖는다. 그것에 화가의 붓 터치, 색의 선택, 명암 등의 인위적 기법 등이 가미될 때, 자연물인 해바라기는 비로소 예술 작품으로 바뀐다. 예술을 경험한다는 것은 바로 자연물에 더해진 이 기법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법은 예술의 본질이며, 그리하여 쉬클로프스키는 문학을 "그 안에 사용된 모든 문제적 기법들의 총계"라고 정의한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학의 내용이란 이와 같은 형식(기법들)이 가동되기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소위 "기계론적" 형식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클로프스키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성격과 본질을 가장 명증하게 보여준 이론가이며, 문학에 대해 (형식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유물론적인 태도를 취했던 논자이다. 그에 의하면 문학은 (물질적) 기법들의 총계이자 상징주의 시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떤 '신비로운' 뮤즈의 산물이 아니다. 쉬클로프스키는 문학을 기법이라는 객관적 '사실'로 규정하고 그것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했던 것이다.
쉬클로프스키는 「기법으로서의 예술」에서 낯설게 하기의 다양한 예를 들고 있다. 가령 톨스토이는 사물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 사물을 처음 본 것처럼 묘사한다. 또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을 마치 그 일이 처음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묘사해서 낯설게 만든다. 톨스토이는 「수치 Shame」라는 작품에서 "태형(笞刑)"이라는 명사(이름) 대신에 "법을 어긴 사람들을 발가벗기고 바닥에 집어던진 후, 회초리로 그들의 발가벗은 엉덩이를 때리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이런 묘사에서 '태형'이라는 (묘사) 대상의 속성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달라지는 것은 "태형"이라는 친숙한 (그래서 무덤덤하게 다가오는) 행위가 잔인하고도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새롭게 '지각'되는 것이다. 위에서 대상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재현 수단인 기법이 중요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톨스토이는 또한 사유재산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기 위해 「콜스토머 Kholstomer」라는 작품에서 사람이 아닌 말(馬)을 화자로 동원한다. 사람이 화자일 경우, 사유재산제는 너무나 '친숙'해서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말의 시각에서 인간의 사유재산제를 바라보는 순간, 사유재산제는 이상하고도 낯선 괴물이 되어버리며 그것의 억지스러움, 어리석음, 비논리성이 일거에 폭로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낯설게 하기는 비문학(비예술)적인 재료를 문학(예술)으로 변형시키는 방식이다. 따라서 낯설게 하기는 문학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들이 필수적으로 경유하는 통로이고,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 자연물(세계)이 문학(예술)으로 생산될 수 없다. 거꾸로 문학(예술) 작품에서 낯설게 하기를 삭제하는 순간, 모든 문학(예술)은 비문학(비예술)으로 환원된다. 1917년,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뉴욕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남성용 소변기에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여 출품함으로써 논란을 일으켰다. 변기가 화장실에서 원래의 용도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아무런 '새로움'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소변기"라는 이름 대신에 "샘"이라는 이름으로 은유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소변기가 아니다. 소위 "레디메이드 예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정확히 말하면 그가 1913년에 내놓은 "자전거 바퀴"라는 작품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이 작품은 예술의 '형식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이다. 뒤샹에게 있어서 "레디메이드 예술"이란 소변기나 자전거 바퀴처럼 '이미 만들어진' (비예술적) 소재를 예술화하는 작업을 의미하지만, 어떤 의미로 모든 예술 작품의 내용이나 질료는 이미 존재하는 '레디메이드'로서의 진부한 대상에 불과하다. 고흐가 그린 농부의 신발이나 세잔이 그린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의 풍경은 얼마나 흔하도록 낡아빠진 것인가. 그러나 이 '레디메이드'의 세계에 예술의 기법이 덧입혀지는 순간, 그것들은 전혀 새로운, 매우 낯선 대상으로 변형된다. 이 변형의 과정과 방식이 바로 '낯설게 하기'인 것이다.
(# 책 사진 /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에세이 네 편을 모아놓은 책 / Russian Formalist Criticism: Four Essays. / 이책은 국내에도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청하, 1984)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되었다.)
파블라(스토리)와 슈제트(플롯)_ p.234
토마쉐프스키, 티니야노프, 쉬클로프스키 등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또한 서사(narrative) 장르에 있어서 "파블라"(fabula, 스토리를 드러내는 러시아어. 이하 스토리)와 "슈제트"(sjuzet, 플롯을 나타내는 러시아어. 이하 플롯)의 구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왜 애써 스토리와 플롯을 구분하려 하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들은 스토리/플롯 논의를 통하여 문학을 비문학과 구별시켜주는 문학 고유의 자질, 즉 '문학성'을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형식주의자들에 의하면 스토리란 사건을 단순히 인과관계에 따라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플롯은 스토리에 나타나는 인과관계와 연대기적 순서를 '특정한 미적 목적'을 위해 교란 ·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특정한 미적 목적'이란 바로 '낯설게 하기'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스토리는 문학작품의 질료이지 그 자체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원료인 스토리를 새롭고 낯설게 만들기 위하여 재배열하고 재구성한 것이 플롯이다. 이런 점에서 쉬클로프스키는 스토리를 "플롯의 구성을 위한 원료"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스토리와 플롯 중, '문학적인 것'은 오로지 플롯뿐인 것이다.
스토리와 플롯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다음의 예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구성하는 서사는 그 자체 플롯이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스토리를 예술적으로 재구성한 결과이다. 그런데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죄와 벌』의 줄거리를 요약한다고 가정해보라. 이 요약의 순간, 예술적 구성물로서의 『죄와 벌』은 사라지고, 이 작품 안의 모든 서사는 간단한 인과관계와 연대기로 환원된다. 이 환원된 연대기가 바로 스토리이다. 스토리는 그 자체 이미 문학이 아니다. 세계문학이라는 정전(正典)의 반열에 든 어떤 위대한 소설들도 그 줄거리를 요약하는 순간 '뻔한' 스토리로 전락하며 문학이 아닌 비문학의 자리로 돌아간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문학을 비문학으로 돌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생각해보라. 『죄와 벌』의 스토리 자체는 매우 흔한 것이며 그만큼 특별할 것도 없다. 가난한 청년이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하고 회개한다는 이야기는, 조폭 두목이 수감 생활을 하던 중 회개하고 성직자가 되었다는 스토리만큼이나 진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플롯의 외피를 입는 순간, 그것은 매우 새롭고도 충격적인 서사로 변모한다. 플롯은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서사를 '낯설게' 만들어주는 가장 대표적인 문학적 장치(기법) 중의 하나인 것이다.
쉬클로프스키는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문체론적 논평」이라는 글에서 18세기 영국 소설가인 스턴(Lawrence Steme)의 『트리스트럼 샌디 Tristram Shandy』에 대해 논하면서, 이 글의 목적이 "로렌스 스턴의 소설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플롯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들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서두를 연다. 그에 의하면 스턴은 (문학예술상의) "극단적인 혁명가"로서, 그의 특징은 자신의 기법을 "드러내는 것(to lay bare)"이다. 스턴의 소설은 미래주의의 시들처럼 문학의 장치들(devices)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과 달리 인과관계와 사건의 연대기적 순서를 무시하는 매우 다양한 장치들을 동원한다.
쉬클로프스키의 설명을 빌면, 이 소설의 서두는 마치 자서전의 분위기를 띠면서 주인공 샌디에 대해 말하려는 것 같지만, 주인공의 조상들에 대한 묘사로 이야기가 흩어져버리고 만다. 결국 주인공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끼어든 다른 이야기들에 의해 오랫동안 지연된다. 소설의 구성 역시 뒤죽박죽이다. 제일 앞에 나와야 할 헌사(獻辭)는 책의 15페이지에 와서야 등장하고, 서문 역시 제자리에 있지 않고 제3권 20장에 등장한다. 가장 심한 환치(displacement)는 소설의 전체 장(章)을 뒤바꾸어 놓은 것(transposition)이다. 가령 제9권의 18~19장은 제25장 뒤에 나온다.
스턴의 소설에는 이렇게 구성상의 환치만이 아니라 소위 "시간의 환치"도 빈번히 등장한다. 가령 원인이 결과 뒤에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쉬클로프스키에 의하면 이런 의미에서 "문학적 시간은 분명히 자의적(arbitrary)이며, 그것의 법칙은 일상적 시간의 법칙과 일치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일상적 시간"이 스토리의 시간이라면 "문학적 시간"은 플롯의 시간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런 예를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볼 수 있는데, 가령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 비극들은 사건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지 않고, '사건의 중간에서(in medias res)' 시작한다.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오이디푸스 왕 Oedipus the King』은 오이디푸스의 출생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어 어머니를 이미 부인으로 취하고 난 상태에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플롯의 전개에 따라 앞에서 일어난 일이 뒤늦게 다시 소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턴이 보여주는 바) 일상적 시간에 대한 이와 같은 다양한 교란은 왜 일어나며 그 효과는 무엇인가. 스턴은 소설의 구성과 시간을 뒤죽박죽 교란시켜 놓음으로써, 소설의 스토리보다 구성의 기법을 두드러지게 '전경화(前景化 foregrounding)'시킨다. 앞에서 "에술은 대상에 부여된 예술적 기법을 경험하는 방식"이라고 하였거니와, 이 기법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은 인위적 장치로서의 기법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낼 때 가능하다. "기법을 드러내기"는 이런 의미에서 독자로 하여금 문학의 본질로서의 기법을 직접 마주치게 하는 방식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훌륭한 예술 작품을 칭찬할 때 우리는 흔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표현을 쓴다. 하늘의 옷은 너무나 완벽해서 꿰맨 자국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꿰맨 자국"은 바로 인위적인 기법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술의 핍진성(verisimilitude)을 중시하는 리얼리티의 예술을 현실로 착각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술 작품의 장치(기법)는 예술의 본질이므로 감추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내어 주목시켜야 할 대상이다.
모티프와 동기화_ p.237
스토리/플롯과 관련하여 토마쉐프스키는 「주제론」이라는 에세이에서 모티프(motif)와 동기화(motivation)의 개념을 발전시킨다. 그에 의하면 주제(theme)는 어떤 통일성을 가지고 있고 일정한 질서로 배열된 작은 "주제적 요소들(thematic elements)"로 구성되어 있다. 서사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토마쉐프스키의 표현을 빌면 "환원 불가능한 irreducible") 주제적 요소들을 그는 "모티프"라고 부른다. 상호 연관된 모티프들이 작품의 주제를 연결하는 띠를 형성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토리는 "논리적이고 인과적 · 연대기적인 순서로 배열된 모티프들의 집합체"이고, 플롯은 "그것들과 동일한 그러나 원래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관련성과 순서를 가진 모티프들의 집합체"이다. 이렇게 보면 모티프들은 스토리와 플롯 양쪽의 구성물이지만, 스토리와 플롯에 따라 그것의 연결 방식에 차이가 난다. 토마쉐프스키가 볼 때, 플롯의 미적 기능은 그것에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플롯이야말로 전적으로 "예술적인 창조물"이다.
토마쉐프스키에 의하면 하나의 작품 안에는 통상 서로 다른 종류의 모티프들이 공존한다. 그는 이런 입장에서 모티프를 크게 두 종류, 즉 "필수 모티프(bound motif)"와 "자유 모티프(free motif)로 나눈다. 필수 모티프란 스토리의 전개상 빠져서는 안 될 모티프를 지칭한다. 가령 『심청전』에서 심청의 아버지가 봉사였다든가, 심청이 공양미 300석에 팔렸다든가, 심청이 환생을 했다든가, 심청 아버지의 눈이 떠졌다든가 하는 모티프들은 그중 단 한 개만 생략되더라도 스토리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와 그 여동생을 살해하는 모티프, 소냐를 만나는 모티프, 그리고 회개를 하는 모티프들은 스토리 전개상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모티프들이다. 그러나 문학작품 안에는 생략되어도 스토리의 전개에 큰 무리가 되지 않는 다른 모티프들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자유 모티프라고 부른다. 그런데 필수 모티프들만으로는 스토리는 만들어질지언정 문학작품은 완성될 수 없다. 인과관계로 스토리 라인을 형성하는 필수 모티프들 사이에는 수많은 세부 묘사들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거의 대부분 자유 모티프들이다. 만일 문학작품 안에서 자유 모티프들을 전부 제거한다면, 우리는 축약된 앙상한 스토리만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플롯을 형성하는 것, 즉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것은 바로 자유 모티프들이다.
필수 모티프/자유 모티프라는 구분 외에 토마쉐프스키는 또한 "동적 모티프(dynamic motif)"와 "정적 모티프(static motif)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동적인 모티프는 스토리상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모티프를 말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를 살해함으로써 가난한 학생에서 범죄의 피의자로 변환되고,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죽음의 길로 간다. 이런 모티프들은 플롯보다는 스토리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정적 모티프란 상황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모티프들을 일컫는다. 이런 점에서 토마쉐프스키는 "동적 모티프들은 스토리에 핵심적이며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모티프들이고, 플롯에서는 정적 모티프들이 지배적이다"라고 말한다.
문학작품 안에는 이렇게 수많은 필수 모티프/자유 모티프, 동적 모티프/정적 모티프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이렇게 다양한 모티프들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이다. 문학작품들은 저마다 모티프들을 배열하는 고유한 법칙들을 가지고 있고, 이 각각의 법칙은 해당 작품에 모티프가 배열된 그 특정한 방식을 정당화해준다. 이런 점에서 "개별적인 모티프들 혹은 모티프 무리들의 도입을 정당화시켜주는 장치들의 네트워크"를 토마쉐프스키는 "동기화(motivation)라고 명명한다. 문학작품에 사용되는 동기화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지만, 토마쉐프스키는 이를 크게 세 종류로 나눈다.
첫째로 "구성적 동기화(compositional motivation)"가 있다. 구성적 동기화의 모티프 배열 원칙은 철저하게 "경제성(econmy)"과 "유용성(usefulness)"에 토대해 있다. 작품 안에 '쓸모없는' 모티프들은 존재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모티프들이 낭비가 없이 사용되어야 한다. 가령 체호프는 어떤 작가가 서사의 도입부에서 벽에 박힌 속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서사의 말미에서 주인공이 반드시 그 못에 목을 매달고 죽어야만 한다고 말하는데, 이런 예는 정확히 구성적 동기화에 해당된다. 작품의 서두에서 주인공이 벽에 못을 박는 장면이 나오는데,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 모티프와 연관된 다른 언급이 전혀 없다면, 이모티프는 적어도 구성적 동기화의 차원에서는 쓸모없는 것이다.
둘째로 "사실적 동기화(realistic motivation)"가 있다. 사실적 동기화에 따르면 모티프들은 "개연적인(probable)" 배열을 통해 "실물과 똑같음(lifelikeness)"의 상태를 재현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묘사가 "사실적((realistic)"인 느낌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문학적 서사는 근본적으로 허구이지만, 사실적 동기화는 그 허구에 사실적인 느낌을 부여하도록 모티프를 배열할 것을 요구한다. 문예사조로 보면 리얼리즘,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흔히 사실적 동기화가 작동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셋째로 예술적 동기화(artistic motivation)가 있다. 예술적 동기화의 원칙은 한마디로 '낯설게 하기'이다. 예술적 동기화의 원칙에 따르면 모티프들은 오로지 친숙하고 습관화되고 자동화된 대상을 새롭고 참신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배열된다. 예술적 동기화는 때로 위에서 설명한 사실적 동기화릐 원칙과 충돌하기도 한다. 가령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에 등장하는 소인국, 거인국, 말의 나라에 관한 모티프들은 사실적 동기화의 원칙을 철저히 위배하지만, 예술적 동기화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장치에서 미적 기능으로_ p.241
위에서 우리는 낯설게 하기, 스토리와 플롯, 기법을 드러내기, 모티프와 동기화 등, 러시아 형식주의의 주요 논제들을 살펴 보았다. 이 논제들은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고 힜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문학성'의 해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문학과 비문학을 구별시켜주고 문학을 문학이게끔 해주는, 문학 고유의 자질인 '문학성'에 대한 해명이야말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최대의 과업이었던 것이다. 결국 문학을 문학이게끔 해주는 것은 문학의 형식적 측면, 즉 기법 혹은 장치들이라는 것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인데, 이런 입장을 가장 강하게 밀어붙인 이론가는 물론 쉬클로프스키이다. "기계론적 형식주의"라는 비판까지 감수하면서 그가 주장한 것은 결국 문학적 장치(기법)만이 문학의 고유한, 유일무이한 영역이라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에 의하면 '장치들의 총계'이며, 문학작품의내용은 형식이 가동되기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
형식주의자들의 이런 입장은 1924년 (마르크스주의자인) 트로츠키(Leon Trotsky)의 『문학혁명 Literature and Revolution』의 출간과 더불어 본격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트로츠키는 형식주의자들의 성과를 일부 인정했지만, 예술 작품을 대하는 그들의 전반적인 입장을 "사회적 인간의 심리적 요소를 간과한" 것으로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문학예술은 사회적 존재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구성물이다. 따라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은 문학작품의 사회성 · 정치성의 해명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 혹은 형식 바깥에 존재하는 사회적, 정치적, 이념적 제 요소들에 대한 형식주의자들의 배제는 이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러시아 형식주의-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이와 같은 긴장 관계에서 러시아 형식주의에 일정한 출구를 마련해준 이론가가 있다. 그는 바로 야콥슨과 함께 1926년 <프라하 언어학회>를 창설한 체코의 이론가 무카로프스키(Jan Mukarovsky)이다. 그에 의하면 문학성의 해명에 있어서 문학적 장치가 매우 중요하지만 장치 자체에 대한 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하여 무카로프스키는 장치 개념에 소위 "미적 기능(aesthetic function)"의 개념을 추가할 것을 제안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장치들은 진공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 · 역사적 맥락 속에서 존재한다. 이 말은 결국 동일한 장치도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미적 기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현대 문학이론 입문 A Reader's Guide to Contemporary Lierary Theory 』의 저자인 셀던(Raman Selden)에 의하면 "교회는 예배의 장소이자 동시에 미술품일 수도 있고, 돌은 문짝의 버팀돌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무기, 건축자재 혹은 예술적 감상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정치적 연설, 전기, 편지, 선동 글 등도 서로 다른 사회적 맥락과 시대에 따라 미적 가치를 가질 수도 있고,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무카로프스키의 '미적 기능' 개념을 도입하면 형식주의자들의 '장치'에 대한 논의는 일거에 사회 · 역사적 함의를 갖게 되고 문학 내적인 문제에만 갇혀 있다는 혐의에서도 일정하게 벗어나게 된다. 또한 미적 기능 개념에 의하면 낯설게 하기에 관한 논의 역시 새로운 지평을 맞이하게 되는데, 가령 어떤 맥락에서 진부한 장치가 다른 맥락에서는 새로울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가정 역시 가능하게 된다. 말하자면 새로운 장치가 낯설게 하기를 곧바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역시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논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후속 논의들_ p.243
러시아 형식주의는 문학 형식에 관한 배타적인 접근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형식주의는 야콥슨, 무카로프스키. 프로프(Vladimir Propp) 등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구조주의로 이어졌고, 문학 고유의 속성에 대한 탁월한 설명으로 무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 문학이론의 반열에서 밀려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형식에 대한 과도한 관심 그리고 일상 언어와 시적 언어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 등은 다른 논자들의 비판적 입장들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가령 이글턴(Terry Eagleton)은 『문학이론입문 Literary Theory: Introduction』이라는 책에서, 시적 언어를 일상 언어라는 "규범(norm)"으로부터의 일탈로 간주하는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그에 의하면 "일탈"이 가능하려면 일탈의 대상인 "규범"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동등하게 공유하는 공통의 통용체(currency)로서 어떤 단일하고도 '규범적인(normal)' 언어가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가령 옥스퍼드대학 철학자들의 일상 언어와 (글래스고 지역) 부두 노동자들의 일상 언어는 거의 공통적인 것이 없다. 이글턴에 의하면, 우리가 실제 사용하는 언어는 고도로 복잡한 수많은 담론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계급, 종교, 젠더, 지위 등에 따라 서로 구분된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결코 어떤 단일하고도 동질적인 언어 공동체로 단정하게 통합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의 '규범'이 다른 사람에게는 '일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흐친 학파(The Bakhtin school)의 바흐친(Mikhail Bakhtin)과 메드베제프(Pavel Medvedev)도 공저인 『문학 연구에 있어서의 형식적 방법 The Formal Method in Literary Scholarship』을 통하여 일관되게 형식주의를 비판한다. 그들은 형식주의자들이 시적 언어를 전경화하면서 문학으로부터 객관적 현실을 배제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들에 의하면 문학작품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문학은 문학 외적인 다른 것들, 즉 과학적, 윤리적, 이데올로기적인 창조물들과의 비교, 대조를 통해 해명될 수 있다고 본다.
제임슨(Fredric Jameson) 역시 『언어의 감옥: 구조주의와 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해 The Prison-House of Language: A Critical Account of Structuralism and Russian Formalism』라는 저서를 통해 (구조주의와) 러시아 형식주의가 문학을 언어외적 세계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스스로 "언어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이 모든 소음들 그리고 그 모든 결점에도 불고하고, (문학의) 형식으로 제한해서 이야기하자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만큼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 이론도 흔치 않다. 더욱이 이 문학의 생명을 "낯설게 하기"에 둔 것은, 새롭지 않으면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는 슬로건과 등치되면서 문예(예술) 창작 영역에도 나름의 큰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다. 그러나 포더니즘을 거쳐 모스트모더니즘의 단계에 이르러 작가들은 '형식의 고갈'을 이야기한다. 더 이상의 새로운 형식은 없다는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러시아 형식주의는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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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시인동네』2016-11월호 <오민석의 현대문학이론 산책/ 제2장 러시아 형식주의> 전문
* 오민석/ 충남 공주 출생, 1990년 『한길문학』창간기념 신인상-시 당선, 1993년 《동아일보》신춘문예-문학평론 당선, 시집 『그리운 명륜여인숙』『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시 해설집 『아침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문학이론서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평전 『송해평전: 나는 딴따라다』등. 현재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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