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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유희 혹은 기묘한 부부 이야기/ 김경엽(金京燁)

검지 정숙자 2016. 10. 20. 21:47



『문학사상』2016-10월호 <연재중국문학 산책 9회>



    문자유희 혹은 기묘한 부부 이야기


     김경엽(金京燁)



  1. <봉구황> 부르는 밤

  지난 2006년 우리나라 여배우(박시연)가 출현한 중국 드라마가 국내의 한 케이블 티비에서 방영된 적이 있었다. 2002년 중국 CCTV에서 제작한 <봉구황(鳳求凰, 34부작)> 이란 역사극이었다. 드라마의 주인공 사마상여(司馬相如)와 탁문군(卓文君)의 로맨스는, 내용이야 다르긴 하지만 서구의 로미오와 줄리엣 만큼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사랑의 서사다. 우리나라 여배우가 맡았던 역이 바로 탁문군이었다. 사마상여탁문군 이야기는 2천 년의 세월을 건너왔고, 지금도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 연극,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소재로 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의 이야기가 전승되며 반복 재생산되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어떤 점이 대중들의 호기심과 재미를 지속적으로 자극해온 것일까. 

  사마상여(기원전 179-117)는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사람으로 서한(西漢) 때의 문인이었다. 비상한 글재주 덕분에 당시 양효왕(梁孝王)의 식객 문인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제법 문명을 날렸다. 그러나 양효왕이 갑자기 죽자 문객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또한 터덜터덜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며 하루해를 보내곤 했다. 35살의 노총각이자 영락없는 룸펜이었다. 그의 딱한 처지를 눈여겨 보던 지인의 배려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는 문인은커녕 역사에서 지워진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성도에서 가까운 임공(臨邛)의 현령이었던 왕길(王吉)이 바로 사마상여의 지인이었다. 상여는 임공으로 건너가 왕길에게 잠시 의지하게 된다.

  임공에는 사업을 해서 크게 돈을 번 탁왕손(卓王孫)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늘 현령인 왕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다. 가만히 보니 현령의 집에 웬 귀한 손님이 와 있는 것 같았다. 탁왕손은 이때다 싶어 손님을 위해 잔치를 열테니 꼭 함께 참석해달라는 초청 의사를 왕길에게 보냈다. 정작 성대한 잔치가 열리던 날, 상여는 몸이 아픈 핑계를 대고 왕길 혼자 보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거듭 상여의 참석을 독려하자, 왕길은 몸소 상여를 맞으러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제야 상여는 못 이기는 체하며 왕길을 따라 잔치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한 일종의 트릭이었던 셈이다. 탁왕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상여의 준수한 외모에 놀랐고, 한편 현령이 직접 모시러 갈 만큼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잔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왕길이 거문고를 상여에게 건네며 한 곡조 연주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극구 사양하더니 마지못하는 척하며 상여가 무릎에 거문고를 얹을 때, 아까부터 문 뒤에 숨어 상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이름은 탁문군. 탁왕손의 둘째 딸이자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안 되어 남편과 사별하고 돌아온 17살 어린 과부였다. 문군은 처음부터 상여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상여도 마찬가지였다. 탁왕손의 집에 재색을 겸비한 어린 청상과부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가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계기로 어린 과부를 유혹해보겠다는 '연애작전'을 이미 세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문고를 무릎에 눕힌 상여는 근사한 연주솜씨를 뽐내며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 그가 부른 노래가 바로 <봉구황>이다. 


    봉구황_鳳求凰


  봉이여 봉이여 고향으로 돌아왔구나  鳳兮鳳兮歸故鄕

  짝을 구하려고 세상을 헤매었으나  游遨四海求基凰

  때를 만나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하더니  時未遇兮無所將

  오늘 밤 이 집에 올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何悟今夕升斯堂

  어여쁜 여인은 규방에 있는데  有艶淑女在閨房

  방은 가까우나 사람은 멀어 애간장이 타는구나  室邇人遐毒我腸

  어떤 인연으로 한 쌍의 원앙이 되어  何緣交頸爲鴛鴦

  서로 목덜미를 부빌 수 있을까

  어찌해야 하늘 높이 함께 날 수 있을까  胡頡頏兮共翶翔

  황이여 황이여 나를 따라 둥지를 틀어다오  凰兮凰兮從我棲

  나와 혼인하여 영원히 짝이 되어주렴  得托孶尾永爲妃

  정 나누고 몸을 통해 마음의 조화 이루어  交情通體心和諧

  깊은 밤 함께 지낸다 해도 누가 알겠는가  中夜相從知者誰

  두 날개 활짝 펴고 높이 날아올라  雙翼俱起翻高飛

  더 이상 내가 슬퍼하지 않도록 해주렴  無感我思使余悲


  우리가 흔히 '봉황'이라고 할 때의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이다. 그러니까 '봉구황'이란 '봉'이 '황'을 구한다는 뜻이므로 이 노래는 문군에 대한 상여의 구애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구애의 방식이 좀 원색적이다. 시어 '자미(孶尾, 짐승의 수컷과 암컷이 교미하여 새끼를 낳는다는 뜻)'가 보여주듯 노래가 몹시 육감적이고 에로틱하다. 이 노래가 문군에게 들려주기 위해 즉흥적으로 부른 노래인지 아니면 미리 치밀하게 준비한 노래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봉구황>은 두 사람이 최초로 만나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대중들이 이들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까닭 중의 하나도 최초의 만남이 시와 음악과 노래를 매개로 이루어졌다는 도저한 낭만성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노골적인 노래로 프러포즈를 받은 문군의 마음은 어땠을까. 2천 년 전, 동시대를 살았던 사마천(司馬遷)은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에서 당시의 정황을 우리에게 이렇게 들려준다.    

 

 "탁왕손에게는 과부가 된지 얼마 안 된 문군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음악을 좋아하였다. 문군에게 한눈에 반한 상여는 현령과 함께 짐짓 모르는 척 점잔을 떨며 거문고를 연주하여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 문군은 문틈으로 몰래 그를 엿보고 마음이 끌려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와 부부가 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사마천의 문맥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서로 첫눈에 반한 꼴이 된 셈이다. 첫눈에 이끌린 사이에서 더 큰 일은 잔치가 끝난 후에 벌어졌다.

 

 

   2. 2천 년 전의 로맨틱 코미디 

  잔치가 끝나자 사마상여는 그냥 돌아가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문군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은밀히 전달했다. 문군은 상여의 유혹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바로 냅다 상여의 집으로 달려가 동침하게 된다. 2천 년 전의 로맨틱 코미디이자 유쾌한 야반도주였다. 그리고는 얼마 후 상여의 고향인 성도로 함께 달아났다. 캄캄하고 아득한 봉건예교 시절, 두 사람은 '사분(私奔)'과 '사통(私通)'을 동시에 감행한 것이다. '사분'은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달아나는 것이고, '사통'은 부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이다. '사분'이 전통 혼인제도에 대한 도전이라면, '사통'은 이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파괴행위였다. 두 사람은 용감하게 도전했고, 과감하게 파괴했다.

  상여의 고향인 성도로 온 문군은 상여의 집을 보자마자 기가 막혔다. 사마천의 전언에 따르면, 한 칸짜리 방에 있는 것이라곤 벽 네 개뿐이었다(家居徒四壁立)고 한다. 거문고와 노래의 달인이자 준수한 외모를 지닌 상여의 유혹에 넘어가 달아났으나, 그녀가 도착한 곳은 가난뱅이의 텅 빈 집이었다. 두 사람은 곤궁한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마침내 문군이 먼저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어렸지만 당차고 당돌했다. 다시 임공으로 돌아갑시다. 거기엔 우리 형제들도 있으니, 돈을 빌려서라도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가도록 합시다. 하고는 상여와 함께 가산을 모두 정리해서 임공으로 돌아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행동했다. 마을 어귀에 술집을 차리고 술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문군이 직접 술을 팔았고, 상여는 팔을 걷어붙이고 술과 안주를 날랐다. 설거지며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문군은 부잣집 딸의 허세를 잊었고, 상여는 문인의 허명을 벗어버린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온 마을에 퍼졌다. 딸의 소식을 들은 탁왕손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딸이 가난뱅이와 야밤에 달아난 것도 괘씸한데, 이젠 근처에서 술장사까지 하고 있으니, 세상이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문을 닫아걸고 아예 바깥출입조차 하지 않았다. 한 푼의 재산도 줄 수 없다고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형제들과 지인들이 하나둘 찾아와 탁왕손을 말리기 시작했다. 상여가 가난하긴 하지만 그래도 재주가 많은 사람이고, 무엇보다도 딸과 함께 사는 사람이니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모두들 그를 설득했다. 결국 탁왕손은 문군에게 노복 백 명과 돈 백만 전, 그리고 옷과 이불 등 혼수품까지 챙겨 주었다고, 사마천은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갑자기 부자가 된 두 사람은 다시 성도로 돌아왔다. 젊고 예쁜 아내는 물론 재력까지 갖게 된 상여에게 이번에는 관운까지 따르는 행운이 이어졌다. 당시 즉위한 한(漢) 무제(武帝)가 이전에 상여가 지은 「자허부(子虛賦)」라는 직품을 읽게 되었다. 크게 감동한 무제는 상여를 수소문했고, 상여는 바로 입궁하여 무제의 사냥 정경을 스펙터클하게 묘사한 「상림부(上林賦)」란 작품을 지어 바친다. 이 시대의 주류문학 장르였던 부(賦)는 한마디로 통치자에게 아부하는 문학이었다. 황제의 공덕과 태평성대를 찬양하는 미사여구로 가득한 어용문학이었다. 글재주가 있어야 쓸 수 있었지만, 내용과 정신은 텅 빈 채, 오직 통치자의 오락과 유희에 봉사하는 문학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이 시대 개인의 글쓰기 능력이란 최고 권력자에게 봉사함으로써 입신과 출세의 기회를 얻는 유력한 수단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기층민중의 삶을 이해하고 대변하는 참여적 지식인으로서의 글쓰기 의식은 아직 잠잠하던 시대였다. 사마상여는 이러한 시대 정황에 최적화된 글쓰기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문인이되 어용문인이었고, 문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지식 상인에 가까웠던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무제의 총애를 받아 낭관이란 벼슬까지 오르며 출세의 길로 접어드는 듯했다. 

 

 

   3. 숫자 시 혹은 문자유희

  사마상여는 안팎으로 명성이 자자해지면서 교류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자연히 화류계에 출입하는 일도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여자가 생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릉(茂陵) 여자를 첩으로 들이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즈음 상여가 문군에게 보냈다는 편지 한 통이 유독 우리의 관심을 끈다. 편지의 내용인즉 이러했다.

 

  일이삼사오륙칠팔구십백천만  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白千萬

 

  편지치고는 정말 이상한 편지다. 일부에서는 숫자 시라고 하지만, 아무리 너그러운 잣대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시라고 하기엔 적잖이 민망하다. 숫자만 나열된 저 편지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숨어있는 것일까. 일부의 해석에 따르자면 이렇다. '만' 다음에는 순서상 '억(億)'이 나와야 하는데, '억'이 없으니까 '무억(無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어 발음 '억(億)'은 '억(憶)'과 동음이어이다. 그러니까 이 편지가 숨겨놓은 메시지는 '무억(無憶)'이라는 것이다. '무억'은 추억이나 기억이 없다는 뜻이다. 사마상여의 맥락에서 좀 더 친절하게 풀이하자면, '당신과 함께했던 추억이나 기억이 없다' 즉 '이제 당신과의 사랑은 식었다. 그러니 헤어지자'는 결별의 의사표시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해석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썰렁한' 문자유희의 혐의를 피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 편지가 진짜라면, 상여의 문재와 인품이란 새털처럼 가볍고 경박하다고 해도 그가 그리 억울해 할 일은 아닌 듯하다. 만약 후대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한다면, 상여라는 발랄한 캐릭터가 낳은 상상의 재치 한 장면 정도가 되겠다. 어쨌거나 더 흥미로운 것은 이 편지를 받고 문군이 보냈다는 답장이다. 배신의 통보를 받은 그녀는 과연 어떤 내용의 답신을 보냈을까. 그녀의 답신을 일명 원랑시怨郞詩라고 부른다. '남편을 원망하는 시'라는 뜻이다. 

 

 

  한번 에어진 후  一別之後

  두 곳에서 서로 그리워합니다  二地相思

  그저 서너달이라더니  只說三四月

  오륙 년 이별할지 누가 알았을까요  又誰知五六年

  칠현금을 무심히 연주하고  七弦琴無心彈

  팔행서(편지)를 썼으나 전할 길이 없군요  八行書無可傳 

  가지고 놀던 구련환(서로 엇물린 쇠고리 아홉 개를 꿰거나 풀면서 놀이하는 도구)은 가운데가 끊어졌고요  九連環從中折斷

  (그대 오실까) 십리 밖 정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十里長亭望眼慾穿

  백가지 생각과  百思想

  천 가지 번민이 일어납니다  千繁念

  아무리 해도 당신을 원망할 수밖에요  萬般無奈把君怨

  온갖 말로도 다 할 수 없어요  萬語千言說不完 

  마음이 허전하고 무료하면 자주 난간에 기대요  百無聊賴十依欄

  중양절엔 높은 데 올라 외로운 기러기 바라봅니다  重九登高看孤雁

  중추절의 달은 둥근데   八月中秋月圓人不圓 

  (당신이 없으니) 사람들은 둥글게 모이지 못했네요

  칠월 중순엔 촛불을 켜 향을 피우고 七月半燒香秉燭問蒼天

  푸른 하늘에 기도를 합니다

  유월 더운 날엔 사람마다 부채질하지만  六月伏天人人搖扇我心寒

  내 마음은 춥기만 하군요

  오월엔 불꽃같은 석류도 꽃 끝에는  五月石榴如花

  이따금 차가운 비 뿌립니다  偏遇陣陣冷雨澆花端

  사월 비파는 아직 익지 않았는데  四月枇杷未黃

  거울을 보니 마음만 어지러워요  我慾對鏡心意亂

  갑자기 분주한 듯  忽匆匆

  삼월 복사꽃잎은 흐르는 물 따라 떠다니고  三月桃花隨水轉

  우수수 낙엽 떨어지듯  飄零零
  이월 하늘이 연은 실이 끊어지고 마는군요  二月風箏線兒斷

  아! 그대 낭군이시여  噫, 郞呀郞

  다음 생애에선 당신이 여자가 되고  巴不得下一世

  내가 남자가 되기를  你爲女來我爲男

 

 

  남편의 한 줄짜리 편지에 대한 아내의 긴 답장이다. 유희하듯 보낸 남편의 가볍고 짧은 메시지에 대해 아내는 진지하고 순정을 담은 긴 답장으로 응대했다. 응대의 이면에는 남편의 경솔함과 부박함을 질타하는 아내의 은밀한 목소리가 숨어있음음 물론이다. 내용은 잠시 제쳐두고라도 형식면에서 문군의 시는 상여의 얄팍한 문자유희를 압도하는 원숙한 숫자 시의 진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측에 적은 원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이 시가 숫자로 정교하게 이루어진 연환시(連環詩)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시는 원문 속의 숫자가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 백, 천, 만으로 상승했다가 다시 만, 천, 백, 구, 팔, 칠, 육, 오, 사, 삼, 이, 일로 하강하는 원환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배신과 실연의 상처에 응답하는 편지를 쓰면서도 유희에 가까운 문자행위에 정성을 기울였던 탁문군의 정신적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대 진짜 문인의 명예는 상여가 아니라 문군의 몫으로 돌려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문군이 상여에게 보낸 시 「백두음白頭吟」은 그 영예에 값하듯 우리의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한다.

 

 

  (그대 사랑하는 마음은) 높은 산의 눈처럼 희고  皚如山上雪

  구름 사이 달빛처럼 밝았었지요  皎若雲間月

  그대 두 마음 지녔다는 말을 듣고  聞君有兩意

  결연히 헤어지려 이 편지 보냅니다  故來相訣絶

  ……

  쓸쓸하고 처량하지만  凄凄復凄凄

  이미 출가한 몸 울지 않겠습니다  嫁娶不須啼

  일편단심 한 사람을 만나  願得一心人

  백발이 되도록 헤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白頭不相離

  ……

 

  단호한 결별의 시다. 두 마음 지녔다는 상여의 배신에 대한 문군의 대응은 차가우면서도 뜨겁다. 차가움은 단호한 결심이 뿜어내는 절망의 감각이고, 뜨거움은 '일편단심'과 '백발'에 대한 소망을 태우면서 끌어올렸던 순정한 마음의 온도이다.

  이 시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상여는 마음을 돌렸고,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침내 '해피엔딩'이었다고 후일담을 전해주는 문학사가들이 있다. 중요한 건, '해피엔딩' 여부가 아닐 것이다. 2천 년 전 한 쌍의 남녀 이야기에 깃든 대립 쌍의 세목들일 것이다. 가령 파격과 일탈, 코믹과 유쾌, 도주와 행운, 문인과 어용, 배신과 순정, 글쓰기와 문자유희 같은 것들 말이다. 세목들은 어느 정도 사소하거나 기묘하거나 혹은 통속적이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이 오랫동안 관심과 호기심을 끌었던 배후에는 아마도 우리에게 어떤 욕망이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때의 욕망이란 대체로 통속성 혹은 선정성과 가까운 이웃일 것이다. '탁문군 같은 여자 만나 인생이 바뀐 사마상여의 행운',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은 탁문군의 순정' 따위에 대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백일몽이 2천 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면 좀 과장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때론 이런 통속과 백일몽에 의지해 문학이 오랫동안 보존되거나 기억되기도 한다는 점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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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사상』2016-10월호 <연재중국문학 산책 9회>에서

 * 김경엽(金京燁)/ 시인, 강원 원주 출생, 2007년『서정시학』으로 등단, 고려대 대학원 비교문학비교문화협동과정 박사과정 수료, 현재 총신대 교양학과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