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2016년 백남준과 시게코를 만나다/ 남정호(南禎鎬)

검지 정숙자 2016. 11. 11. 17:04

 

 

  <특집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서거 10주년 기념>

 

 

    2016년 백남준과

    시게코를 만나다

 

     남정호(南禎鎬)중앙일보 논설위원 

 

 

  백남준은 죽지 않았다

  지난 2006년 1월 29일, 한국이 낳은 세계적 거장 백남준이 타계(1932~2006,74세)했다는 소식이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나는 그때 뉴욕 특파원으로 있었기에 백남준의 서거 뉴스를 비중있게 다뤄야 했다. 장례식장은 맨해튼 미드타운의 프랭크 캠벨이었다. 며칠 후 빈소가 차려지자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다른 일을 보고 허겁지겁 뒤늦게 도착한 장례식장은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넓은 실내에 덩그러니 마호가니 나무 관이 놓여 있었다. 열린 관뚜껑 안으로 고요하게 누워있는 백남준의 모습이 보였다. 서양의 풍습대로 화장을 한 얼굴이 마치 혈색이 도는 것처럼 상기되어 보였다. 그것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백남준의 모습이었다.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식장 안은 검은 옷을 입은 몇몇의 사람들이 장례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백남준 재단에서 온 사람들인 듯했다. 그 사이로 슬픔에 잠긴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첫눈에 그녀가 백남준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라는 것을 알았다. 반가운 마음에 한 발짝 다가서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옷깃을 잡았다.

  "성격이 불 같습니다. 함부로 말 걸지 마세요."

  그는 재단 관계자였다. 그러나 이미 숱한 거절과 쓴 맛을 겪어본 내가 그 정도 경고에 포기할 리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기 기자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이제 싸늘한 대답이 나올 차례였다.

  "뭐가 궁금하세요?"

  시게코는 예상을 깨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용기를 얻은 나는 준비해온 질문을 하나도 빠짐없이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알찬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어디 하나 빈틈이 없는 특집기사였다. 그 후 시게코와 나는 간간히 편지를 주고  받았다. 시게코는 자신의 인터뷰 기사에 실린 사진이 마음에 든다면서 보내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해왔다. 나는 즉시 서울 본사에 연락하여 사진을 보내주었다. 시게코에게서 장문의 감사편지가 왔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전시회에 나를 초대했다.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우리의 우정은 점차 두터워져갔다. 그리고 나는 '백남준'이라는 거대한 예술가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설 수 있었다. 그리고 시게코와의 예술적 교류와 놀라울 만큼 자유분방했던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뽑으면 뽑을수록 끝없이 나오는 칡줄기처럼 시게코가 들려주는 백남준의 이야기는 지칠 줄을 몰랐다. 마치 백남준이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한 듯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펼쳐졌다.

 

  광기와 도발 그리고 낯선 신세계

  공연 도중 무대 뒤로 사라진 한 남자가 잠시 후 날이 번쩍이는 도끼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무대 위에 세워둔 검은 피아노를 향해 돌진해 순식간에 피아노를 때려 부쉈다. 시퍼런 도끼날이 허공을 가르고 치솟아 건반 위로 떨어졌다. 흰색, 검은색 건반들이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남자가 사납게 피아노를 앞으로 밀쳐내자 쾅!하고 피아노가 쓰러졌다. 내장이 드러나듯 피아노의 부속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무대 위로 나뭇조각과 쇳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머리로 그린 그림도 기괴했다. 남자는 먹물이 담긴 대야에 머리를 담그고 머리카락에 흠뻑 먹물을 적셨다. 그런 후 무릎을 꿇고 펼쳐 놓았던 기다란 종이에 머리로 선을 긋기 시작했다. <머리를 위한 참선>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였다.

  다음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었다. 남자는 갑자기 신고 있던 구두를 벗었다. 그리고는 그 안에 물을 부었다. 남자는 주저없이 신발을 들어 단숨에 물을 마셔버렸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만 같은 장면이었다. 그리고는 그는 벌떡 일어나 무대 뒤로 사라졌다. 십 분 후 어디선가 벨소리가 울렸다. 공연이 끝났음을 알리는 무대 바깥에서 걸려온 전화벨 소리였다. 백남준은 끝이 없는 기행으로 관객들의 심장을 뛰게 하고 숨을 멎게 했다.

  1960년대 초 독일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백남준은 일본의 예술계를 삽시간에 뒤집어 놓았다. 신문과 잡지는 이 독창적인 전위예술가의 출현을 반가워했다. 그의 거침없는 퍼포먼스는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파격적이고 치명적이었다.

  백인이 주류를 이루는 유럽 예술계에 백남준은 기존의 문화를 전복시킨 테러리스트였다. 그는 멀쩡한 바이올린을 내리쳐 산산조각을 내고, 가위를 들고 객석에 뛰어들어 관객의 넥타이를 싹둑 자르고 그 자리에서 샴푸를 꺼내 머리를 감았다. 그는 스스로를 '황색 재앙'이라 불렀다.

 

  플럭서스와 연인들

  당시 독일에서 태동한  '플럭서스' 운동은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등을 신봉하는 다다이즘과 맥을 같이 한다. '흐름'이라는 뜻을 가진 플럭서스 운동은 한마디로 반자본주의적 성향의 예술적 행동주의다.  일본의 플럭서스 운동은 존레논의 부인이었던 오노 요코와 그녀의 첫 남편이었던 피아니스트 이치야나기 도시가 주도하고 있었다. 시게코는 당시 플럭서스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일본 최고의 명문인 도쿄대학 출신인 백남준이 반항적인 공연을 감행한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1964년 7월 시게코는 뉴욕의 캐케디 공항에 서 있었다. 큰 키에 푸른 눈을 가진 리투아니아 출신의 예술가 마키우나스가 시게코와 그녀의 친구를 마중나와 있었다. 차는 맨해튼에서 남쪽의 다운타운으로 달렸다. 마침내 커낼 가 359번지 플럭서스 본부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기 깜짝 놀랄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시게코가 그토록 연모해왔던 백남준이었다.

  1960년대 뉴욕은 미국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현대미술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도쿄에서 활동했던 백남준에게도 뉴욕을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세계적인 예술가로 성장하려면 유럽과 함께 뉴욕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시게코와 백남준은 플럭서스 동지들과 함께 차이나타운의 음식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난한 뉴욕 예술가의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두 사람은 플럭서스의 동지로서 매일 만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진전되지 않았다.

  당시 백남준은 유태인 출신의 첼리스트 샬럿 무어맨과 뉴욕 예술계을 흔드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었다. 갈색 머리에 섹시한 몸매를 가진 샬럿은 누가 보아도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당시 샬럿은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전위적인 공연을 기획했다. 그것은 독일인 행위예술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이 구상한 전위음악극 <오리기날레>였다. 슈토크하우젠은 1960~1970년대 아방가르드 음악가로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친, 독일이 낳은 최고의 현대 음악가 중 한 명이었다. 슈토크하우젠은 <오리기날레>를 구상하면서 백남준을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설정했다. 샬럿은 슈토크하우젠의 <오리기날레>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백남준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치광이 행위예술가 역할로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그로 인해 플럭서스 본부의 마키우나스와 심한 갈등이 있었지만 백남준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오리기날레>는 나날이 승승장구하며 화제를 뿌렸다. 그러던 중 시게코에게 한 장의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백남준이 보낸 것이었다. 시게코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공연을 마치고 두 사람은 맨해튼 남쪽 커낼 가 부근의 싸구려 아파트로 향했다. 마침 둘 다 집이 같은 방향이었다. 초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날 밤, 시게코의 낡고 오래된 아파트에서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었다. 시게코의 긴 짝사랑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슬픈 결혼식

  백남준은 유목민 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있었다. 시게코는 그로 인해 종종 외로움을 느꼈다. 당시는 일본 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오노 요코가 뉴욕에 건너와 전위 예술가로 명성을 얻고 있을 때였다. 그 때문인지 미국인들은 일본 여자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유태인 작곡가 데이비드 베어먼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데이비드는 돈 많은 상류층 유태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는 시게코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시게코의 마음은 온통 백남준뿐이었다. 그녀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예술적인 감각을 지닌 백남준을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비의 도시 뉴욕의 가난한 삶은 시게코를 지치게 했다. 낮는 학교를, 밤에는 일식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거기에 일본인 초등학생에게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데이비드의 구혼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시게코는 남준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당신을 기다리면 될까요?"

  남준은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데이비드와 결혼해. 난 결혼과는 어울리지 않아." 시게코는 크게 실망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시게코는 결국 데이비드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 결혼은 오래 가지 못했다. 시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시아버지는 일본이 2차대전 당시 유태인 6백만 명을 죽인 독일과 동맹국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일본을 극도로 중오했다. 데이비드와 헤어진 후 시게코는 곧장 캘리포니아의 백남준을 찾아갔다.

  시게코는 백남준과 평범한 가젇을 이루며 살고 싶었다.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 시게코는 병원을 찾았다. 검사를 해보니 자궁 안에 혹이 있다고 했다. 악성종양, 암이었다. 의사는 당장이라도 자궁 적출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더구나 수술비와 치료비가 엄청났다. 시게코는 일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하루빨리 일본으로 돌아오라고 성화였다. 시게코는 마음을 굳히고 여행가방을 쌌다. 그때 백남준이 다가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시게코. 우리 결혼하자, 당장."

  또 무슨 퍼포먼스를 하려는 것인가 싶어 시게코는 혼란스러웠다.

  "방송국에서 일할 때 들었던 블루크로스 보험이 아직 유효해. 나랑 결혼해서 아내가 되면 당신도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어."

  시게코는 울먹이며 말했다. "난 이제 아기도 낳을 수 없는 여자예요. 당신과 결혼할 자격이 안 된다고요." 그러자 백남준이 큰 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시게코. 난 지금도 시간이 모자라. 나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골치만 아프지."

  우울하고 슬픈 결혼식이었다. 1977년, 뉴욕 시청에서 앞을 볼 수 없는 친구 필립을 증인으로 세워 결혼식을 올렸다. 순전히 의료보험 때문에 서둘러서 하게 된 날림 결혼식이었다.

 

  연인 · 제자 · 조수 · 스승, 고보타 시게코

  현대미술의 거장, 위대한 천재 예술가로 불리는 백남준은 사실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적 큰 누나의 어깨 너머로 피아노를 배웠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음악 교욱만을 받고 음악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 시절에도 그는 현대음악의 매력에 빠진 미학도였다. 백남준은 미술보다 음악을 더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미술가보다는 음악가, 그 중에서도 작곡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시작했다. 도쿄대학 졸업논문으로 쉰베르크 연구를 쓸 정도로 현대음악에 빠진 음악도였고, 일본을 떠나 독일에서 공부한 것도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가깝게 지내던 한 일본인 교수에게 "나는 조형은 안 돼"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세계 현대미술의 거장이 될 수 있었을까. 시게코를 인터뷰하며 그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바로 시게코였다. 백남준에게 연인이며 제자였던 시게코는 동시에 조수였으며 그의 스승이었다. 두 사람은 40여 년간을 함께 하며 치열한 예술적 교류를 나누었다.

  시게코는 학창 시절부터 미술 레슨을 받고 대학에서도 조각을 전공한 미술작가였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를 창조해낼 만큼 첨단기술에 능했다면 감성적인 면에서는 시게코가 한 수 위였다. 시게코는 미술에 대한 많은 지식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도움을 받아 백남준은 '비디오 스컬프처(Video sculpture)' 즉 '비디오 조각'이라는 영역을 개척하게 되었다. 크고 작은 TV를 쌓아 인물처럼 만든 비디오 설치작품으로는 <칭기스칸의 귀환>, <스키타이 왕 단군>, <캐서린 대제>, <로베스피에르> 등이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예술적 영감을 주고 받으며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나갔다.

  2008년 여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연락이 왔다. 시게코의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특별전시회에 선보이겠노라는 소식이었다. 브루스 나우먼, 매튜 바니, 폴 매카시 등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들의 작품 100여 점을 골라 6개월간 전시한다고 했다. 시게코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출품작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는 전시회장 입구에 시게코의 작품을 배치한다는 소식이 온 것이다. 시게코는 하늘에 있는 백남준에게 말했다. "남준, 들었어요? 당신이 만든 비디오아트 세계에서 내 작품이 최고  중의 하나로 꼽힌대요!"

  시게코는 백남준과의 삶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남준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내게는 '아트'였습니다." ▩

 

    -------------------  

  *문학사상』2016-10월호 <특집/ 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서거 10주년 기념>

  * 남정호(南禎鎬)/ 중앙일보 논설위원, 저서 『나의 사랑 백남준』『나는 일하는 사무총장입니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