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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서의 문청/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6. 9. 18. 16:24

 

 

시와정신2016-가을호 | / / / / / / 56

 

 

     문장으로서의 문청

 

    정숙자

 

 

   序

  아, 나는 거미조차도 존경한다. 그는 한 그물에 둘이 살지 않는다. 혼자 제 집 짓고 바람에 출렁이며 비가 와도 끄떡없이 우연히 걸려든 먹이만으로 살아낸다. 그의 유일한 사냥법이란 가만히 있기. 혼자의 힘을 일구고 믿으며 화려한 의상도 없이… 묵묵히 생애를 비우고 가는 그를 나는 오래 전부터 존중해왔다. 나의 모자라는 점을 모두 보완하고 갖춘 그는 바위도 아니면서 어쩜 그리도 나대지 않고 연약한, 투명한 집 한 채 결어 허공을 지탱할 수 있느냐. 누군가 집을 허물면 저항도 없이 다시 짓고, 다시 혼자, 매달려 사는 그의 영혼을 빈 구석 많은 나 자신이여, 어찌 우러르고 배우려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문인목의 조건, 하나  

   바위틈에 뿌려졌다는 것

  문인목(文人木)이란 깎아지른 바위틈에서도 푸른빛 잃지 않고 외로이 서 있는 나무를 지칭하는 용어다.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그 모습을 화폭에 담고, 글로 읊으며 철학적 사상으로 수용하여 본을 삼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네 삶이란 늘 천인절벽에 서서 온갖 고초를 겪는 나무와 다를 바 없으니, 야위었지만 단아한 그 수형을 보면서 위안과 용기를 얻어가졌던 것이리라. 장삼이사 여염에서도 그런 산수화 한 점쯤 소장하는 게 가풍의 격조를 대변해 주기도 했던 것 같다.

  사람이든 나무든 거기 태어난 것은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라고들 한다. 그리고 천차만별 개개인의 삶과 굴곡을 운명으로 돌린다. 올려다보면 내 별자리가 척박하고, 내려다보면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기도 한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평균치를 내보면 모두가 비탈에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구의(地球儀)를 보라. 어디 한 군데 평지가 있는지. 그 지구에 발붙이고 나부끼는 숨결이 우리들이니 어느 누구에겐들 이 땅의 삶이 남쪽이기만 하겠는가. 그러므로 나 역시 풀뿌리다.

  풀뿌리이기는 하지만 솔뿌리로 착근하려는 애씀이 있어야 자신에게 맡겨진 운명을 돕는 일일 것이다. 나는 호남의 한 모퉁이에서 하잘 것 없는 씨앗으로 뿌려졌다. 역사에도 기록된 임진년(1952) 대흉년에 태어났으며 병약했고, 서너 살 무렵, 천연두로 인해 고열에 시달리다가 고막이 곪아터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너무 어렸던 탓에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른 채 성장했다. 하여 때때로 묻는 말에 즉답이 어려웠던 나는 부모형제로부터 어리석은 아이로 인식되었다.

  자연히 말수가 적었으며 까불지 않았고 한 자릿수 나이에 벌써 늙기 시작했다. 늙는다는 것은 이모저모 생각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유아기 전후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명랑했던 무릎은 적고 무작정 구슬프기만 했다. 땀 흘려 일하시는 부모님, 넉넉지 못한 집안 살림, 어둡게만 내다보이는 미래 등등. 도무지 하는 짓이나 마음속이 어린애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뇌에 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아 발육 체계 전반이 늦어지거나 아예 깨어나지 못하는 카오스적 흐릿함에 머물렀던 것이다.

 

 

   문인목의 조건, 둘

   온몸으로 적응한다는 것

  그러나 무심치 않은 하늘은 나에게서 청력을 깎은 대신 원만한 시력을 선사했다. 한글을 깨우치자마자 나는 책 속에서 온 세상의 이야기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읽음’은 곧 ‘들림’이었고 육체 안쪽의 활동이었다. 한 점 살점이었던 애벌레가 비로소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라버니의 책상에서 발견한 방정환의 『사랑의 선물』은 내 품에 진정한 ‘사랑의 선물’로 안겨졌다. 읽고 또 읽고, 또, 또, 또 읽어… 결국 책장 모서리들이 나달나달 닳아지다 못해 떨어져나갔다. 권선징악/사필귀정에 충실한 동화책을 그리도 읽어댔으니 평생토록 바꾸지 못할 나의 도덕률은 그때 이미 주입되고 결정되어 근간을 이루지 않았나 싶다.

  그리하여 나의 두뇌는 수학이나 과학, 생물… 에서 영영 멀어지고 말본(당시에는 ‘말본’이 있었음)과 국어에 치중했으며, 영어 과목조차 단어 외우기는 무시한 채 “누가 바람을 보았을까요?” 따위에만 정신이 팔렸다. 열여섯에 도스또옙스끼의『죄와 벌』을 읽었는데, 예순다섯에 이른 현재까지도 만화책은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주인공과 배경들을 그림으로 보느니보다 상상하는 편이 훨씬 더 아름답거나 무한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흔이 다 되도록 『닥터 지바고』라든가, 『전쟁과 평화』도 영화로는 보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펼쳤던 상상의 세계가 현상으로 제시되는 게 예술성을 무너뜨리는 소이로 여겨질 뿐이었다.

  눈 쌓인 날, 『안나 까례니나』를 빌리러 가는 밭길, 논둑길, 숲길은 행복했다. 이 여러 장면이 이어진 후 나타나는 이웃마을 내 친구 집엔 골방 가득 책이 꽂혀 있었는데, 그해 겨울엔 꼭 톨스토이를 알고 싶은 것이었다. 친구 집에 책을 빌리러 가는 날이면 나는 으레 세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정다운 내 친구와 꿈에 그리던 대문호와 그리고 나 자신이었다. 한 권의 책을 독파할 때마다 나는 어제 없던 자신을 일깨웠고 또 가다듬는 소목(小木)이었다. 나는 어떤 무엇이 되려하기보다 책 속에 흐르는 빛을 내 어두운 머리에도 좀 비쳐들게끔 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언제라도 책을 읽으면 가난하거나 초라하지 않았으며 든든했다.

  그러니까 내 스무 살 안쪽의 심적 중심이란 그런 것이었다. 읽기와 더불어 또 하나의 즐거움을 들추자면 베끼기였다. 학교 공부는 성적이 영 나쁜데다가 재미도 아주 없어 작파한 터였으므로 나는 천성에 따라 ‘싶은’ 짓을 하면 그만이었다. ‘읽거나, 짓거나, 베끼거나’ 그 중 어느 것을 택해도 순간순간이 반짝거렸다. “이제 그만 불 끄고 자거라” 아버지의 걱정을 듣고서야 밤이 이슥했음을 알아차리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때 베낀 목록으로 가장 인상적인 몇 편은 버나드 쇼의 「그는 그녀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했나」, 오 헨리의 『마지막 한 잎』, 서정주의 “숙이여, 글월 받아 읽었소”로 시작되는 편지 외에도 많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생 깊숙이 들어와 버리는 것. 다시는 돌아설 수 없도록 미래까지를 못 박아 버리는 것. 내가 그토록 열심히 글을 베낀 이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온 몸을 기울여 ‘적응’하고 있었던 폭이다. 빌린 책은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 아까운 글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이끌림에 힘입어 ‘나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길은 고독하지만 충만했고, 힘겨웠지만 즐거웠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는 자의 침묵 속 풍경이랄까. 나는 그 시절 이후, 수중에 몇 푼이 있는 한 책을 빌리지 않는다. 밑줄 칠 수 없고, 돌려줘야 하고, 먼 훗날 다시 열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문인목의 조건, 셋

   간서치로 살아간다는 것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간서치(看書癡)란 “책 읽는 데만 열중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라 한다. 그 외에 간서벽(看書癖)과 서음(書淫)이라는 칭호도 있으니, 이는 모두 책 읽기에 정신 팔린 사람을 은유한 명사다. 그런데 그런 말 꾸밈 역시 책 읽는 자들이 자조적으로 지어낸 풍유일 것이리라. 세상은 나를 읽고, 나는 세상을 읽는다. 남모르는 사이 떼어놓는 한두 걸음 한순간쯤이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거라 지나치지만, 실인즉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왜냐하면 한두 걸음 한순간들이 쌓이는 장소가 바로 뒤꼍이나 다락에 숨겨둘 수 없는… 어디든 앞세우고 다녀야 하는 자신의 얼굴이며 몸 전체이고 자세인 까닭이다. 더구나 문인에게는 글이 곧 얼굴이자 말이고 행동이므로 ‘언행일치’라는 사자성어 앞에서 나는 늘 주눅 들고 켕기는 한 칸이 있다. 자투리 시간이라도 애써 살피고 다려내지 않으면 그 한 칸을 메우기커녕 갈수록 더 커지기만 할 게 아닌가. 전진이 아닐 바에야 퇴보보다는 답보도 괜찮은 편. 내 독서의 나침반은 거기쯤이다.

 

   “(…) 고향의 어느 구석진 밭두둑에 피는 조그만 꽃의 기억과도 같이 언제나 서러운 그대의 편지./ 숙이여./ 나는 이 편지를 가지고, 지금 조용한 어느 나무 그늘이나 풀밭을 찾아가려 하오./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고쳐 고쳐 읽으려 하오./ 서러운 행복, 숙은 그런 일을 생각해본 일이 있소./ 십칠일쯤 내성하겠다고 하였으나, 지금 서울 와서는 절대로 못 쓰오. 서울이 어디라고!/ 내가 언제 마음 놓고 오라고 하도록 까지는 괴로운 대로 쓸쓸한 대로 기다려주는 것이 나를 위해주는 일이오./ 괴롬을 참고,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기다려주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길이오./ 숙! 취직은 아직 마련이 없소./ 아주 싼 월급 자리가 있긴 하지만, 이건 나도 좀 생각해 볼 일이오. (…)”  ※미당 서정주, 아내에게.

 

  이 편지는 앞서 말한 내 소녀시절의 노트를 펴고 옮겨 적은 몇 줄이다. 스물한 살의 필적과 변색된 지면에 만감이 흥건하다. 당시 나는 이 편지(박목월 엮음『여성과 書翰』)가 그의 여느 시보다도 매혹적이었다. 아직 추위가 덜 가신 삼월 어느 청명한 밤, 나는 깊은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며 가당치도 않은 꿈을 꾼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내가 만일 시인이 된다면 서정주 선생님을 한번만이라도 뵈올 수 있다면 그런데 그 황홀한 상상이 현실이 될 줄이야! 그로부터 16년 후,

  기적과도 같이 나는, 미당 선생님이 발행인/편집인으로 찍힌 『文學精神』(1988.12.)에 선생님의 추천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행복했는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만일 내 무덤에 풀꽃이 피어난다면, 그건 내가 간직하고 간 오늘의 기쁨일 거야”라고. 그런데 그 12월호가 선생님이 편집인/발행인으로 인쇄된 마지막『文學精神』호였다. 따라서 나는 등단지에 등단작 말고는 한 편도 발표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하지만 스승님의 추천사는 지금도 따뜻하다.

 

 

    문인목의 조건, 넷

   소신을 갖는다는 것

  연륜으로서의 문청은 있을 수 있으나 문장으로서의 문청은 있을 수 없다. 문장으로서의 문청은 회고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지속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줄일진대 문맥이 산맥이다. 새록새록 넘어서야 하고 다가서야 한다. 똑같은 사물을 표현했다 하더라도 공시적/통시적 문장이 확연히 다르므로 어찌 시시각각 문청으로 아니 살 수 있으리오. 연치(年齒)에 관계없이 탐구/모색/노력을 담보할 뿐, 다른 샛길이란 엿볼 여가조차도 없다. 문인으로서 문장을 얻었다면 다 얻은 것이요, 글은 문장으로 시작으로 시작해서 문장으로 끝난다.

  어떤 시조(始祖)는 알에서 났다하고, 어떤 성자는 성령으로 태어났다하고, 또 어떤 인물은 신묘한 기운을 입어 잉태했다고도 한다. 감히 그런 어법으로 풀어도 된다면 나는, 한미하기 그지없는 시인일망정 책에서 태어났다… 여기고 싶다. 부모님으로부터 전반을 배웠으나, 어떤 토양의 출생일지라도 그 가르침이 삶의 골목을 모두 비춰줄 수는 없는 법. 때때로 난관에 부딪히고 발 디딘 비탈이 무너지려 할 때마다 나는 책에 의지해 밤을 새웠다. 책은 내 청력을 도왔고, 벗이 되어주었으며, 세계를 비춘 등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운명은 늘 내 편에 섰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몹시 고통스러웠지만 전화위복, 그 악재가 호재를 숨겨 보낸 포장지였음을 깨닫곤 했다. 청력의 부실함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누구와 대화를 할지라도 경청하는 태도로 일관할 수 있었고, 겸손은 저절로 습득되었으며, 책을 끼고 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지 않았던가. 또한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져 불문곡직 천착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으니 나는 오늘까지의 모든 숙명과 운명을 사랑하고 불운과 행운에 감사하며, 이제 또 책과 함께 노을을 맞으려 한다.

 

 

   結      

  겨울 다음엔 바로 봄이다. 겨울을 거치지 않고 오는 봄이란 없다. 나는 숨이 끊어지리만치 고뇌에 찬 젊음을 보냈지만 부모님이나 운명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타고난 환경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p-214)라는 문장을 이해하는 데까지 왔다. 신체조건에 결격이 많아 곤충 축에도 들지 못하는 거미. 바람침대 하나로 거뜬히 제 운명을 드높이는 거미. 그렇다! 나도 내 운명에게 “그동안 힘들었지?” 인사하며 작은 꽃이라도 건네고 싶다. 물론 나 자신을 읽게 한 책들에게도 그리해야지! 문인목은 아무리 나이테가 쌓여도 새 잎을 밀어 올린다. 결코 고유의 색깔을 잃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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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정신』2016-가을호 <젊은 날의 초상 · 56> 전문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생략) 시집 『하루에 한 번 밤을 주심은』『그리워서』『이 화려한 침묵』『사랑을 느낄 때 나의 마음은 무너진다』『감성채집기』『정읍사의 달밤처럼』『열매보다 강한 잎』『뿌리 깊은 달』, 산문집 『밝은음자리표』『행복음자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