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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채식주의자』「몽고반점」(발췌)/ 한강

검지 정숙자 2016. 9. 12. 21:40

 

 

   <한국인 최초,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작>

 

 

    『채식주의자』「몽고반점」(발췌)

 

      한 강

 

 

p. 87)

거지?"

  잠시의 침묵 뒤 전화가 끊겼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손아귀에 땀이 흠뻑 배어 있었다.

 

          *

 

   그가 처제를 달리 생각하게 된 것은 분명히 아내에게서 몽

고반점에 대한 말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그전에 그는

조금도 처제에게 딴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 처제가 그의 집

에 있는 동안 보였던 행동들을 기억할 때 그의 몸에서 치밀어

오르는 관능은 추체험에 불과한 것이었다. 베란다에서 손을

활짝 벌려 그림자를 만드는 그녀의 넋 잃은 모습, 그의 아들을

씻길 때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 아래로 드러나던 흰 발목, 방

심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모습, 반쯤 벌린

다리, 흐트러진 머리칼을 기억할 때마다 그의 몸은 뜨거워졌

다. 그 모든 기억 위로 푸른빛 몽고반점이 찍혀 있었다. 퇴화

된, 모든 사람에게서 사라진,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엉덩이와

등만을 덮고 있는 반점. 오래전 갓난 아들의 엉덩이를 처음 만

지며 느꼈던 말랑말랑한 감촉의 희열과 겹쳐져, 그녀의 한 번

도 보지 못한 엉덩이는 그의 내면에서 투명한 빛을 발했다.

  이제는, 그녀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    곡식과 나물과

날야채만 먹는다는 것마저 그 푸른 꽃잎 같은 반점의 이미지

 

p. 88)

와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아울리게 느껴졌으며, 그녀의 동맥

에서 넘쳐나온 피가 그의 흰 셔츠를 흠뻑 적시고 꾸덕꾸덕 짙

은 팥죽색으로 굳게 했다는 것은 그의 운명에 대한 해독할 수

없는, 충격적인 암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의 방은 D여대 근처의 붐비지 않는 자취방 골목에 있

었다. 아내의 당부대로 양손 가득 과일을 사들고 그는 다세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제주산 청견과 사과와 배, 철 아닌 딸기

까지. 손매듭과 팔이 아파왔지만, 그녀의 방에 들어가서 그녀

를 맞닥뜨린다는 것이 일종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깨

달으며 그는 주저하고 있었다.

  결국 과일들을 일단 내려놓고, 그는 휴대폰 폴더를 열어 그

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꼭 열 번의 신호음이 울릴 때까지 그

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과일들을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삼층 코너에 이르러 십육분음표가 그려진 초인종

단추를 눌렀다. 짐작대로 답이 없었다.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뜻밖에 열려 있었다. 어느새 머리칼을 적신 식은땀을 닦느라

고 그는 야구모자를 벗었다가 다시 썼다. 옷매무새를 바로 하

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그는 마침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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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작소설『채식주의자』「몽고반점」에서/ 2007. 10. 30 초판 1쇄 / 2016.6.20. 초판 36쇄 <(주)창비> 발행

* 한 강/ 1970년 광주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1993년 계간『문학과사회』겨울호에 시, 1994년 《서울신문》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당선. 소설집 『여수의 사랑』『내 여자의 열매』『노랑무늬영원』. 장편소설『검은 사슴』『그대의 차가운 손』『바람이 분다, 가라』『희랍어 시간』『소년이 온다』. 산문집『사랑과, 사랑이 둘러싼 것들』『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등. 만해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