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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여운과 감동, 카타르시스/ 강호삼

검지 정숙자 2016. 9. 27. 21:16

 

   

『한국문학인』2016-가을호, 이 계절의 쟁점_ 소설

 

 

    잔잔한 여운과 감동, 카타르시스

 

    강호삼

 

 

  대충 꼽아보니 필자를 포함해서 타칭 자칭 소설가로만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2천여 명을 헤아리는 것 같다. 다른 문학 장르까지 합친다면 5천만 인구에 소위 문인들이라는 사람은 2만 여 명에 이른다. 한 해에도 100여 명씩 늘어나고  있다.

  숫자로만 보면 아이돌과 걸 그룹, 영화와 몇십억을 호가하는 미술품과 함께 한국문학은 지금 가히 찬란한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문인들이 늘어나다 보면 우리나라 인구 가운데 한 사람 건너 시인이나 소설, 수필가들로 넘쳐날 날이 머지않을 것 같다.

  이 틈을 타서 문단 정치꾼들이 득실거린다. 발행 다음날 바로 쓰레기장으로 실어 보내면서도 자신의 입지를 위해 조악한 계간지나 잡지를 만들어 설익은 글을 선별적으로 싣고 원고료도 주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책장사와 신인장사까지 하면서 문학 전반에 대한 질을 떨어트리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만도 아니다. 내용이야 어떻게 되었건 글을 쓸 수 있는 귀중한 지면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서 인구가 줄어들면서 국가의 지원 한 푼 없이 운영이 어렵게 된 각종 문학단체가 회비와 입회비 등을 염두에 두고 여과 없이 이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다. 문학단체의 기관지와 문학지가 부끄러우리만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 이유 중의 하나다. 산문사와 백화점까지 한몫 거들고 있다. 문예 강좌라는 것을 열어서 문인들을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는 모양이다. 속된 말로 발에 걷어차이는 것이 시인이요 소설가요, 수필가들이다.

  분명 어느 한 시절, 문인이라는 존재가 존경의 대상이었다. 우리글을 다듬고 새로운 의미를 확장하는 문인들의 역할을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쓸모없다고 나라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몇십, 몇백억을 지원하는 현시적인 영상과 무대예술과 비교해 볼 일이다.

  따지고 보면 나라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문인들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책 읽는 사람이 없다. 문인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고 그런 글을 써서 독자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바로  문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전동차 안에서 우리 소설을 읽고 있는 이를 보면 반갑고 신기하기까지 하다.

  분명 외부요인도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교양이나 지식과 정보는 모두 책을 통해서 습득했고 모든 길은 책 속에 있었다. 언급할 필요도 없이, 1980년대부터 등장한 검퓨터와 영상매체와 IT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종이책은 점점 설 자리를 잃었다. 필요한 지식과 정보는 인터넷 검색만으로 충분하다. 필요한 모든 정보를 책에만 의존했던 1970~1980년대가 가고 온갖 지식과 즐거움이 인터넷으로 가능해진 세상이다.

  웹 소설과 전자책이 등장하면서 태블릿PC에서나 휴대폰으로 간단히 내려받아 읽을 수 있게 됐다. 얼핏 생각하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 독자층을 넓히는 데 일조하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문학작품은 온라인상의 한계가 존재한다. 상품적인 측면을 배제할 수 없어 심오한 문학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루가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세상이다. 이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한가하게 종이로 된 소설책이나 시집 같은 것을 읽을 시간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IT가 발달한 현대라도 지식을 축적하고 올바른 사유와 자기 성찰과 거친 인성을 순화하기 위해서는 독서만한 것이 없다.

  출판사에서 인세 주며 책 내던 때가 아득한 옛날이다. 아직도  소위 인기 작가라는 몇몇 사람의 소설이 종이책으로 출판되긴 하지만 팔리는 책은 몇천 부가 고작이다. 책이 팔리지 않으니 귀할 수도 있겠는데 책이 너무 흔하다. 필자에게도 협회지와 계간지, 시집과 소설집을 합쳐서 한 달에도 10여 권 이상이 배달된다. 독자도 없는데 문학서적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흔해졌다. 너도나도 자비로 작품집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두 번 친구를 만난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리 자주 만나자는 제의가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매월 한두 번씩 만나 비싸지 않은 밥 먹고 영화 한 편 보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하다가 헤어진다.

  친구가 바랑처럼 어깨에 메고 다니는 천으로 만들어진 가방 속에는 그날의 일간지 두서너 종류와 구취를 가시게 하는 사탕과 물병 휴지 같은 것이 들어 있다. 그중 한 가지,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책이다. 약속 시간에 필자가 늦거나 아니면 그가 먼저 도착했을 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반갑게도 읽고 있는 책의 대부분이 소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소설은 아니다. 일본이나 미국 유럽의 번역본들이다.

  "왜 우리나라 소설을 읽지 않아?" 라고 물을라치면 친구의 대답은 거침이 없다.

  "우리나라 소설은 재미가 없어서. 이 소설 말이야, ○○에서 1억 권이나 팔린 소설이야."

  읽고 있던 책을 들어 보인다. '1억 권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숫자다. 우리 소설에 대해서 친구의 '재미가 없어서'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가슴 아프다.

  소설은 모름지기 서사와 독자를 이끌어 가는 잔잔한 여운과 감동, 카타르시스가 있어야 한다. 우리 소설에 그게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억지로 이야기를 꿰맞추거나 신변잡기의 유치한 내용이 거의 전부다. 아예 무슨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지 알 수조자 없는 것도 있다. 필자나 이름이 꽤 알려졌다는 유명 작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왜 우리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서사가 없는지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언제까지나 신변잡기 같은 것에만 매달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좁은 시야로 조물락거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마냥 실망만 할 수는 없는 것은 어쩌다가 한두 편,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소설을 만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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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학인』2016-가을호 <이 계절의 쟁점/ 소설> 전문

   * 강호삼/ 1975『현대문학』으로 등단, 대표작『진혼(鎭魂)』『메머드 사냥』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