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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채식주의자』「나무 불꽃」(발췌)/ 한강

검지 정숙자 2016. 9. 13. 16:52

   

 

   <한국인 최초,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작>

 

 

    『채식주의자』「나무 불꽃」(발췌)

 

      한 강

 

 

p. 175)

처럼 가슴에 만져져 그녀는 당혹했다. 영혜가 소리 없이 걸어

와 그녀 곁에 선 것은 그때였다.

  ……여기서도 나무들이 보이네.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약한 마

음 먹지 마. 어차피 네가 지고 갈 수 없는 짐이야.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아. 이만큼 버틴 것도 잘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곁에 선 영혜의 옆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직 잎을 다

떨구지 않은 낙엽송들 위로 부서지는 청명한 초겨울 햇살만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위로하듯 평온하고 낮은 목소리로 영혜는

그녀를 불렀다.

  언니.

  영혜의 낡은 검은 스웨터에서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영혜는 한 번 더 언니, 하고 속삭였다.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

 

  행려들과 정신지체환자들을 수용하는 별관 2동을 지나 그

녀는 1동 현관 앞에 선다. 유리문에 붙어 바깥을 보고 있는 환

자들이 눈에 띈다. 며칠째 비 때문에 산책을 못했을 테니 아마

갑갑할 것이다. 벨을 누르자 일층 로비의 간호사실에서 사십

대 후반의 보호사가 열쇠를 들고  걸어나온다. 원무과에서 미

 

p. 176)

리 연락을 받고, 동생이 입원한 삼층에서 내려와 그녀를 기다

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나온 보호사는 날렵한 동작으로 돌아서서 열쇠를

꽂아 잠근다. 담긴 유리문 안쪽에 뺨을 뭉개고 그녀를 바라보

는 젊은 여자 환자가 눈에 띈다. 공허한 두 눈이 뚫어지게 그

녀를 살핀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결코 타인에게 던질 수 없을

집요한 시선이다.

  동생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요?

  삼층까지 오르는 계단에서 그녀는 묻는다.

  보호사는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젓는다.

  말도 마세요. 이젠 링거바늘도 뽑아버리려고 해서, 아예 안

정실에 강박해놓고 진정제 맞히고 링거를 놓습니다. 그 몸에

서 어떻게 뿌리칠 힘은 나오는지……

  그럼, 지금 안정실에 있어요?

  아니요. 좀전에 깨어나서 병실로 옮겼습니다. 두 시에 콧줄

주입한다고 하잖았습니까?

  그녀는 보호사를 따라 삼층 로비로  들어선다. 맑은 날에는

창가의 긴의자에 앉아 해바라기하는 노인 환자들이며 탁구에

열중한 환자들, 간호사실에서 틀어놓은 밝은 느낌의 음악으로

힘차게 느껴지던 공간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 모든 활기를 비

가 삼켜버린 듯하다. 병실에 들어가 있는 환자가 많은지 실내

는 한산하다. 치매환자들은 어깨를 웅크린 채 손톱을 뜯거나

 

p. 177)

발치를 들여다보고 있고, 몇몇 환자들은 말없이 창문에 붙어

있다. 탁구대도 비어 있다.

  그녀는 병동의 서쪽 복도 끝, 큰 창으로 오후의 햇빛이 가장

밝게 떨어지던 자리를 향해 눈길을 던진다. 지난 삼월 비내리

는 숲으로 사라지기 직전, 그녀가 면회왔을 때 영혜는 면회실

로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며칠째 병동 밖으로 나가지 않

으려 한다고 담당 간호사는 원무과의 수화기 저편에서 말했

다. 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유산책 시간에도 병동을 지키

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됐든 먼 걸음을 했으니 얼굴이라도

보고 가겠다는 그녀의 부탁에, 보호사가 그녀를 데리러 원무

과로 내려왔다.  

  서쪽 복도의 저 자리에서 물구나무서 있는 기괴한 여환자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설마 영혜이리라고 상상하지 못했

다. 좀전에 통화한 간호사가 그녀를 그쪽으로 안내했을 때에

야 영혜의 숱 많고 긴 머리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깨로 땅

을 짚고 거꾸로 선 영혜의 얼굴은 피가 몰려 새빨갰다.

  벌써 삼십분째 이러고 있어요.

  간호사는 답답한 듯 말했다.

  이틀 전부터예요. 의식이 없는 것도아니고, 말을 안하는 것

도 아니고…… 다른 긴장형 환자들하곤 달라요. 어제까지는

강제로 병실에 들여보냈는데, 그래봤자 병실에서 다시 물구나

무를 서니…… 그렇다고 강박해놓을 수도 없고.

 

p. 178)

그녀를 남기고 간호사실로 돌아가기 전에 간호사는 말했다.

…… 조금만 힘주어 밀면 쓰러지거든요. 얘기가 잘 안되면

밀어보세요. 안 그래도 저희가 밀어서 병실로 가게 하려던 참

이었어요.

  혼자 남은 그녀는 쪼그려앉아 영혜와 눈을 맞추려 했다. 누

구든 거꾸로 섰을 때의 얼굴은 바로 섰을 때의 얼굴과 달라 보

인다. 별로 살이 없는 편인데도 영혜의 얼굴은 피부가 아래로

밀려 기이해 보였다. 생생히 번쩍이는 눈으로 영혜는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 영혜야.

  대답이 없자 그녀는 좀더 큰 소리로 불렀다.

  영혜야. 지금 뭘 하고 있어. 똑바로 서봐.

  그녀는 영혜의 달아오른 뺨에 손을 뻗었다.

  똑바로 서, 영혜야. 머리 안 안파? 얼굴이 새빨갛잖아.

  마침내 그녀는 영혜의 몸을 힘주어 밀었다. 과연 다리부터

바닥으로 털썩 무너졌다. 그녀는 영혜의 목에 팔을 받쳐 들어

올렸다.

   …… 언니.

  영혜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언제 왔어?

  마치 좋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영혜의 얼굴은 빛나고 있

 

p. 179)

었다.

  보고 있던 보호사가 다가와 그녀들을 로비 한켠의 면담실로

안내했다. 원무과 옆의 면회실로 내려오기 어려울 만큼 증상

이 무거운 환자들은 이곳에서 가족과 면회한다고 했다. 아마

의사와의 면담이 진행되는 곳인 것 같았다.

  그녀가 탁자에 음식을 풀어놓으려 하자 영혜는 말했다.

  언니. 이제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돼.

  영혜는 웃었다.

  나, 이제 안 먹어도 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는 홀린 듯이 영혜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밝은 영혜

의 얼굴을 그녀는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 보았다. 그녀

는 물었다.

  아까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 언닌, 알고 있었어?

  대답 대신 영혜는 물었다.

  …… 뭘?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

……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

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p. 180)

  까르륵 영혜가 웃었다. 그제야 그녀는 영혜의 표정이; 어린

시절의 어느 순간과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꺼풀 눈이

가늘어지며 온통 까매지는 순간, 영혜의 입에서 까르륵, 무구

한 웃음이 터져나오곤 했다.

  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

무서 있었는데…… 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

리가 돋아서…… 땅 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열에 들뜬 영혜의 두 눈을 그녀는 우두망찰 건너다보았다.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없어.

물이 필요한데.

 

          *

 

  수고가 많으시지요.

  그녀는 수간호사에게 인사를 건넨다. 가져온 떡을 내밀며

다른 간호사들에게도 일일이 인사한다. 언제나처럼 영혜의 상

태에 대해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동안, 매번 그녀를 간호사

로 착각하는 오십대의 여자 환자가 창문 쪽에서부터 총총히

걸어와 그녀에게 꾸벅 절을 한다.

  나 머리가 아픈데, 의사선생님한테 약 좀 바꿔달라고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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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작소설『채식주의자』「나무 불꽃」에서/ 2007. 10. 30 초판 1쇄 / 2016.6.20. 초판 36쇄 <(주)창비> 발행

  * 한 강/ 1970년 광주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1993년 계간『문학과사회』겨울호에 시, 1994년 《서울신문》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당선. 소설집 『여수의 사랑』『내 여자의 열매』『노랑무늬영원』. 장편소설『검은 사슴』『그대의 차가운 손』『바람이 분다, 가라』『희랍어 시간』『소년이 온다』. 산문집『사랑과, 사랑이 둘러싼 것들』『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등. 만해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