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구룡동 641번지 종민이네 들깨밭/ 이명열

검지 정숙자 2023. 7. 10. 00:52

 

    구룡동 641번지 종민이네 들깨밭

 

    이명열

 

 

  깻잎이 엽서 같다고 하자

  편지를 쓸 만큼 따가라고 한다

 

  8월의 햇살에 한 잎씩 씻어

  물기 뺀 자음과 모음을 소쿠리에 담으며

  눈여겨보지 않은 시간들 다 놓치고

  간추리고 걸러내고 잘 지내느냐고 한 줄 쓰고 나니

  부랑의 날들 한뎃잠을 자듯 얽히고 설킨다

 

  은닉하듯 쌓아둔 숙제에 배를 쭉 깔던 여름

  깻잎처럼 차곡차곡 개켜진 공책의 침묵은 무뎌서

  증거를 인멸하듯 연필이 부러지고

  표류하던 생각의 거짓 진술에 공책은 찢어지고

 

  고스란히 가라앉은 날것의 향

  오래 삭혀 깊은 맛을 낼까

  은유의 양념으로 초록의 임맛을 돋울까

 

  고민은 오타 없는 잠에도 따라와

  윗목에 밀어둔 숙제처럼

  초록의 공책을 뒤적인다

     -전문(p. 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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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1호)/ 2022. 12. 31. <서정시학> 펴냄

  * 이명열/ 2020 『서정시학』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