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아무 망설임 없이/ 김충규

검지 정숙자 2023. 5. 12. 02:38

 

    아무 망설임 없이

 

    김충규(1965-2012, 47세)

 

 

  살얼음 같은 얼음을 쪼개며 나비가 날아왔다

  그 틈새로 딱딱해지지 않은

  액체의 얼음이 주르르 쏟아졌다

  날개가 젖어서 나비의 비행이 기울었다

  관을 열고 온몸이 얼룩진 시신이 나와

  나비 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무 망설임 없이 관 속으로 나비가 들어갔다

  펄렁임을 멎고 나비가 누워 눈을 감았다

  쪼개졌던 어둠이 봉합되는 소리

  미세하게 허공을 긋고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스르르 관이 닫히는 소리

  시신이 관을 짊어지고 숲으로 사라졌다

  질척한 흙길에 발자국 하나 남지 않고

  고체가 된 어둠이 숨을 감쌌다

  쥐들이 다 죽어버려서 숲이 고요했다

    -전문(p. 184)

 

   -----------------------

  *『2021 통영문학상 수상작품집』역대수상자 작품_에서/ 2021. 10. 15. <도서출판 경남> 펴냄

  * 故)김충규(2010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물 위에 찍힌 발자국』『아무 망설임 없이』, 유고시집『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사화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 범종소리/ 최동호  (0) 2023.07.08
힘 힘 너머로/ 장석원  (0) 2023.05.12
독경/ 김선호  (0) 2023.05.12
호박/ 조동화  (0) 2023.05.11
공동작업실/ 김이듬  (0) 2023.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