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분가(分家)/ 이원복

검지 정숙자 2023. 1. 31. 01:55

 

    분가分家

 

    이원복

 

 

  빚쟁이를 피해 달아나듯 집을 떠났다

  아직 우리의 온기가 남은 방에 박힌 몇 개의 못에

  우리가 걸어 두고 나온 목소리들

  그날 밤 어머니는 홀로 빈 액자 속으로 들어가

  못에 걸리셨다

 

  한 집에서 두 집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한 집에서 또 다른 한 집이 되어 가는 것이다

  내가 버린 감당 못할 무게의 겨울 외투들은

  어머니의 남은 겨울을 덮어 주었으며

  그렇게 나는 거실 한구석 빈 옷걸이가 되었다

 

  안방 빛바랜 벽지를 베어 물고 있던 우리의 그림자들이

  어머니의 엎드린 등을 쓰다듬자

  내 몸 안에 낯선 방 하나가 새로 생겼고

  점점 다른 하나의 집으로 확장되어 갔다

  나는 베란다에 버려진 빨래 건조대처럼

  좁은 방에 두고 온 어머니를 오래 지켜보고 있다

 

  또 다른 한 집이 되어

  주민등록등본 순서대로 누워

  첫 밤을 지내며

  몇 십 년 후 다가올 또 다른 분가를

  걱정한다

    -전문(p.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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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시 포럼 제15집『마이클잭슨의 거미』에서/ 2022. 11. 10. <파란> 펴냄

   * 이원복/ 2014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시집 『리에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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