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파라다이스나무뱀/ 강봉덕

검지 정숙자 2023. 1. 30. 00:48

 

    파라다이스나무뱀

 

    강봉덕

 

 

  발아랜 숨겨진 구덩이가 가득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발목도 없이 구덩이를 건너간다

 

  오래전 일제히 날아올랐다가

  고장 난 비행기가 바닥으로 추락하듯 떨어졌다

  그들이 맨 처음 날아가려고 생각했을 때의 일일 것이다

 

  필요한 동작은 생각에서 오는 것이다

  명예퇴직 후 이력서를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이 확실하다

 

  관절 센터 앞, 무릎 통증을 참으며 계단을 올랐다

  곧 도착하리라 믿었는데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반복해서 옴직였다 몸을 던지지 않으면

  반대편 집에 도착할 수 없다는 듯

 

  화면 속에서 그들은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날기 직전 다리를 버려야 했던 아픈 기억의

  눈빛들, 인간이 직립을 생각했던 것도

  두 손으로 지켜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몸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가는

  그림자 같은 사람을 만지며 긴장한다

  흔적이 없어지는 섬망이 찾아와도

  사라지지 않는 생각들

 

  그들은 벼랑 끝에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생각을 조금 바꾸었을 뿐이다

    -전문(p. 1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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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시 포럼 제15집『마이클잭슨의 거미』에서/ 2022. 11. 10. <파란> 펴냄

   * 강봉덕/ 2006년 ⟪머니투데이 경제⟫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화분 사이의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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