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구라바엔/ 장선희

검지 정숙자 2023. 2. 2. 00:51

 

    구라바엔

 

    장선희

 

 

  꽃은 세 번 피었다 졌지

  상처가 무늬로 새겨질 동안

  나비처럼 날아 봐도 꽃 피지 않았지

 

  나가사키 항에 전함이 들어오면

  하얀 제복 푸른 눈

  푸르스름 턱선에 지평선이 걸렸지

 

  수줍은 얼굴 속 하얀 쵸쵸 

  마도로스의 허밍에 멈춘 게이샤의 사랑

  사랑의 독기가 산다는 위스키에 취해

  갈증 앙상한 뒤태를 만들어 놓지

 

  글로버 하우스로 오르는 언덕길

  돌담은 밀어처럼 이끼를 키우고

  양산 받쳐 걷던 길 위

  게다 신고 뛰어가던 발목도 수국으로 피었지

 

  바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면

  연못 속 수척한 제 얼굴 떨구고 있는 수국

  삼십 년을 세 번 졌다 피었다고

     -전문(p. 14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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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시 포럼 제15집『마이클잭슨의 거미』에서/ 2022. 11. 10. <파란> 펴냄

   * 장선희/ 2012년 『시인광장』으로 등단, 시집 『크리스털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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