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병든 후박나무 섬/ 정창준

검지 정숙자 2023. 1. 28. 01:38

 

    병든 후박나무 섬

 

    정창준

 

 

  해안선에 붙은 공장이 먼저 늙어 가고

  공장이 젊은 시절부터

  출입이 금지되었던 섬이

  해안선에서 840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사람의 눈을 닮아 목도

  동백나무가 많아 동백섬이라 불리지만

  발길이 끊어지면서 이름도 낯설어져

  묵묵히 상록수만 키우고 있다

 

  기억은 시간의 지류에 닿아 있어

  늘 조금씩 유실되었지만 암석 위로

  참담치처럼 까맣게 달라붙는 시간들, 

  붙잡을 것 없는 것들만 부유하는구나,

  봄마다 동백처럼 모조리 유실되는구나

 

  유배지가 된 섬을 바라보다가

  새와 나무들의 안부를 묻는 대신

  출입 금지의 섬을 향해 배를 띄우는 일처럼

  불가능한 일들을

  몇 가지 써 내려가고 싶었지만

 

  잔잔한 파고 아래

  맨살을 드러내는 바위들, 머무르려면

  유실을 각오해야 하리

 

  무른 것들이 단단한 껍질을 키운다

  굳게 다문 이유는 읽히기 싫어서다

  당신을 담고 난 후 단단해지던 표정들

  출입 금지 푯말을 세워 두고 무성해지던 마음들

  네가 점점 우점종優占種이 되던 시간들

 

  다만, 어떤 날은 다친 상괭이의 얼굴로

  물 위로 올려보며 네 이름을 가만히 불렀다

  어디로도 가지 말고 동백 같은 피를 뚝둑 흘리며

  이대로 함께 멸종해 버리자고

 

  나는 하나의 종만 군락을 이룬 섬이고 싶었다

    -전문(p. 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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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시포럼 제19집『마이클잭슨의 거미』에서/ 2022.11.10. <파란> 펴냄

  * 정창준/ 2011년 《경향신문》으로 등단, 시집 『아름다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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