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6 2

지나왔습니까?/ 김한규

지나왔습니까?      김한규     나는 지금 그곳을 지나가고 있다 지나간다 생선 장수는 보이지 않고 트럭의 천막이 열려 있다 그 옆으로 밀가루가 지나간다 지나가면서 밀가루의 밀자가 흐려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사람이 잔을 내려놓았다 탁자의 물기가 컵을 슬쩍 밀고 있다 점심때가 지난다 지나가고 있다 가까이서 베니어합판으로 만든 문이 흔들린다 그 위에 젖은 양말이 걸려 있다 빨랫줄은 보이지 않고 비가 눈으로 바뀌면서 눈이 비로 바뀌는 과정이다 밀가루가 반죽이 될 때까지는 예상할 필요가 없다 전기 패널의 온도를 올려야 할지도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닌데 온도는 예감된다 지나가면서 지나오는 이 마을은 성냥 한 개비면 충분한가 아직 어둠은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질 것이라는 예감은 산 너머에 머물러 있다 주소가..

햇살의 노래/ 지연희

햇살의 노래     지연희/ 시인 · 수필가    땅속 깊은 어둠 속에는 생명의 씨앗들이 흙에 묻혀 움츠린 몸을 조금씩 가다듬어 대지를 뚫고 빛의 세상에 솟아오르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지난한 용기와 결단을 세워보지만 가느다란 숨쉬기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철옹성 같은 단단한 마른땅을 딛고 오르는 결사의 힘을 키우기 위해 생명의 씨앗들은 손톱 끝으로 땅을 파고 어둠의 늪에서 탈출하려 한다. 내 몸 안 깊이 존귀한 생명을 부여해 준 어버이가 걸었던 기억의 흔적을 더듬어 헤쳐나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햇살의 살결이 곱다. 따사롭고 온유하다. 아니 눈부시기까지 한 햇살 한 모금 마시기 위해 슬그머니 눈을 떠 본다. 가슴에 향기로운 꽃향기가 스며드는 느낌이다. 손끝에 닿는 햇살의 온도가 ..

에세이 한 편 2024.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