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지나왔습니까?/ 김한규

검지 정숙자 2024. 9. 26. 02:41

 

    지나왔습니까?

 

     김한규 

 

 

  나는 지금 그곳을 지나가고 있다 지나간다 생선 장수는 보이지 않고 트럭의 천막이 열려 있다 그 옆으로 밀가루가 지나간다 지나가면서 밀가루의 밀자가 흐려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사람이 잔을 내려놓았다 탁자의 물기가 컵을 슬쩍 밀고 있다 점심때가 지난다 지나가고 있다 가까이서 베니어합판으로 만든 문이 흔들린다 그 위에 젖은 양말이 걸려 있다 빨랫줄은 보이지 않고 비가 눈으로 바뀌면서 눈이 비로 바뀌는 과정이다 밀가루가 반죽이 될 때까지는 예상할 필요가 없다 전기 패널의 온도를 올려야 할지도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닌데 온도는 예감된다 지나가면서 지나오는 이 마을은 성냥 한 개비면 충분한가 아직 어둠은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질 것이라는 예감은 산 너머에 머물러 있다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찾는 사람을 지난다 거기에 적힌 주소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종이는 금세 멀어졌다 넘어져 있는 자전거가 눈과 비를 함께 맞고 있다 자전거가 일어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자전거는 넘어져 있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듯하다 어디선가 무전기 소리가 들린다 무전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알자고 한다 왜 보이지 않는 곳에 떨어져 있는가 찾는 것이 가까이 있지 않아서인지 모르지만 내가 찾는 것은 여기에 없다 나는 지나오고 있다 폐타이어를 얹은 지붕에서 빗방울과 눈송이가 함께 떨어졌다 지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지나갈 수 있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갈 것이다 아직 지나가는 중이다

     -전문(p. 35-36)

 

   ---------------------

  * 사화집 『시골시인   Q』에서/ 2023. 7. 31. <걷는사람> 펴냄

  * 김한규/ 경남 하동 출생, 2017년 ⟪영남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일어날 일은 일어났다』

'사화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리꽃 필 무렵/ 남길순  (0) 2024.09.25
일침/ 이희승  (0) 2024.09.18
침묵/ 김병권  (0) 2024.09.18
벽과 벽 사이/ 양문희  (2) 2024.09.17
믿음의 증거/ 성자현  (0) 2024.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