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171

식탁/ 최선

식탁      최선    식탁에게는 누가 밥을 차려줄까   새벽 5시에 가장을 불러 앉히고  나에게는 모닝커피 한잔을 건넨다   숟가락과 밥그릇 부딪는 소리로 허기를 달래는 식탁  그 많은 음식은 제몫이 아니다   노모가 절반을 흘린 밥도  금세 행주가 훔쳐 달아난다   사각의 모서리로 버티는 식탁  가끔 옆구리를 찌르는 것은  허기진 속 알아달라며 내부 비밀을 발설하는  그의 습관성 투정이다   가끔 시장기를 참지못해  발밑에 숨긴 몇 개의 밥알들이  사금파리처럼 날카롭게 발바닥을 찌르기도 한다   귀퉁이에 민들레 한 송이  꽂아 주면  머리핀처럼 반짝이며 근사한 표정을 짓는다   나도 한 때 친척집에 얹혀 살 때가 있었다  때를 놓친 귀가길에는  대문 안쪽에서 밥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면  발뒤꿈치..

민초/ 윤명규

민초      윤명규    베어져 스러지는 풀들을 보라  갈가리 찢긴 조각들이 하늘로 솟구친다  다른 풀들의 품 안에 떨어져 안기고  그들을 껴안은 풀들도  다가올 운명의 무게만큼 허리를 꺾는다   어린 멸치 숨결 같은 것들  결코 생을 구걸하는 법이 없구나  보리밥처럼 눌어붙은 울혈만이  소리 없는 비명을 털고 있다   이름 모를 들꽃과  개고사리, 나팔꽃들도 섞여  의연히 죽음의 칼날을 기다린다   목을 쑥 뽑아 잘리면서도  풋풋한 풋내를 뿌리며  감싸듯 받아주고 그도 스러지고  우는 듯 웃는 듯  몸 조각을 나부끼는  죽어도 죽지 않는 저 이름들   고사리 손 잘라지고  나팔수 사라지면 그 누가 나팔 불어  새벽을 일으킬까     -전문(p. 80-81)   ---------------* 군산시인포..

그때 나 살던 삼양교회 골목길에서··· / 채상우

그때 나 살던 삼양교회 골목길에서 참죽나무가 하루 종일 열심으로 하던 일      채상우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내내 있고  바람 불면 바람이 불어 가는 쪽으로 잠깐 손길을 내밀다 있고  발치에 민들레 피면 홀씨가 흩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고  날이면 날마다 계란 장수가 꼬맹이가 아저씨가 중학생이 폐지 줍는 할머니가 바람 빠진 구루마가 골목 너머 아주아주 안 보일 때까지 내다보고 있고  문득 둘이 와서 꼭 껴안고 있으면 그러나 보다 있고  누가 혼자 와서 울면 다 울 때까지 한참 우두커니 있고  밤이 되면 밤처럼 꾸역꾸역 거기 있던 대로 그대로 있고   그렇게 있는 일   그냥 그렇게 있는 일    -전문(p. 229)  -------------------- * 『시현실』 2024-여름(96)호 ..

나의 멱살에게/ 정호승

나의 멱살에게      정호승    이제는 누가 내 얼굴에 침을 뱉아도  멱살잡이하지 말고 그대로 끌려가라  도둑으로 몰려 멱살 잡혔을 때처럼  끌려가지 않으려고 앙버티지 말고  침이 튀고 단추가 떨어지고 구두 한 짝이 벗겨져도  멱살 잡힌 채로 웃으면서 끌려가라  그동안 느닷없이 멱살 잡히는 일만큼  서러운 일 또 없었으나  이리저리 멱살 잡힌 채 끌려 다니느라  눈물 또한 많았으나  이제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필요는 없다   결국 시간에게  저 늙은 시간에게  오밤중에 멱살 잡혀 끌려갈 줄은 나도 몰랐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도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끌려가면  보고 싶은 어머니가 고깃국에 저녁을 차려놓고  다정히 기다리고 있지 않겠느냐     -전문(p. 227..

천변에 버려진 배춧잎에 관한/ 정병근

천변에 버려진 배춧잎에 관한      정병근    천변 산책로 밑 외진 물가에 배춧잎 서너 장이 버려져 있다.   자전거 짐받이에 배추 한 단을 싣고 온 남자는 자전거를 도로 옆에 세우고 배추를 들고 이곳으로 내려와 겉잎을 뜯어서 버리고 앞 배추를 들고 다시 올라가서 전전거에 싣고 집으로 간다고? 만일 이러려면 배추 한 단을 안고 하필 여기에 와서? 대체 어떤 마음일까? 버려진 배춧잎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담배 한 대 피우기에 손색없는, 비닐과 셔틀콕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낡은 배구공이 미스터리처럼 불쑥 발견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타다만 장작을 발로 툭툭 차다가 오줌을 갈긴들 보는 이도 지적할 이도 없을 이런 곳에 버려진 배춧잎을 설명하기가 영 쉽지 않아서.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거지..

벚나무에게서 온 편지/ 이교헌

벚나무에게서 온 편지      이교헌    어느 날에 이곳에 왔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지 몰랐습니다  밑동이 점점 굵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뿌리는 땅 위에서 서로 얽혀 기어 다니듯 합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겨냈습니다  때로는 뜨거운 태양이 성가신 적도 있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에는 추위를 이겨내느라 고생이  심했습니다  가끔 병약한 이웃들이 사라지는 걸 보았습니다  노을이 걸린 어느 날 저녁은 근사했습니다  더욱 당신이 보고 싶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아주 좋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피해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오롯이 서 있었습니다  당신을 부르며 서 있었습니다  바람으로 흩어지기 전까지     -전문(p. 201) -----------------..

예쁜 여자만 좋아하는 아들아/ 유애선

예쁜 여자만 좋아하는 아들아      유애선    뒷동산엔 못 생긴 여자 아까시나무와 결혼한  키 크고 잘 생긴 남자 소나무가 산단다  여자는 우아하지도 않고 가시까지 달린 볼품없는 나무  오죽하면 단독주택과 소개팅을 하면 번번히 퇴짜를 맞았을까   지나가던 길고양이도 안 쳐다보는 여자와  수많은 아파트와 단독주택에게 둘러싸여 있던 저 남자는 왜 결혼했을까  깎아 놓은 밤톨처럼 잘생긴 소나무가  황폐한 땅, 비탈진 곳에서도 잘 자라는 아까시나무에게 반한 걸까   둘은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뒷동산 신혼집에서 아까시꽃 향기와 송홧가루가 폴폴 날린단다  그리고 양가 가족들과도 친해서  직박구리 엄마, 아빠, 까치 장인, 장모  웃음소리가 끝이 없단다   예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까시나무에게  어쩌..

모자/ 문화빈

모자     문화빈    나는  막내로 태어나 귀염을 받았다  그러나 심심함이 부록처럼 따라다녔다   텅 빈 마당에서  지나가는 개미를 건드려 보다가  소쿠리를 뒤집어쓰고  누렁이에게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화 신은 딱정벌레 이야기   그때 눈을 끔뻑이며 내 말을 듣던 누렁이는  우리 집 가난을 혹처럼, 달고 다니다가  별이 되었다   가난을 얼기설기 꿰매서 입는 우리 집을 탈출한 것이다  손 있는 날이었다  그날 밤에도 나는  누렁이가 UFO를 타고 떠났다는 생각을 지었다   이제 누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그것이 제일 걱정되는 밤이었다      -전문(p. 78) ---------------* 군산시인포럼 제4집 『바다의 메일』 에서/ 2024. 6. 5. 펴냄  * 문화빈/ 2020년 ..

월정사 부엉이/ 박청륭

월정사 부엉이      박청륭    대관령  월정사 석불 귓부리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린다.  밤새 울고 있는  울고서도  아직 울고 있는  둔탁한  목탁,  두툼한 부엉이  소리   -전문(p. 175)   --------------------- * 『시현실』 2024-여름(96)호 에서 * 박청륭/ 1937년 일본 교토 출생, 1962년 계명대 졸업, 1975년『현대문학』으로 등단, 1978년 첫 시집『불의 가면』 외 다수

병아리 유치원/ 박권수

병아리 유치원      박권수    돗자리 속으로 비를 피해 들어간 아이들  톡톡 소리를 낸다  또래의 손짓 몸짓에 통통해진 눈동자  더 가까이 더 은근히  이런 은밀함 처음이야, 히히  눈빛마다 여우나 강아지 고양이들이 들어가  비 온 하루를 덮고  여기저기 터지는 풍선 사이로  달아나는 구름   맨 앞에 젖은 아이를 다른 아이가 당기고  그 아이를 또 다른 아이가 당기고  아이들 옷깃이 모여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서로의 색깔을 묻힌 웃음소리가  귓가에 작은 솜털마저 토닥여 주고는  시간이 시간을 업고 내려와  젖은 병아리 털어주고   고개만 끄덕이던 하늘  푸른 나뭇가지에서 툭 떨어진다  환하게 웃는 병아리  순심주간요양원에 노랑꽃이 핀다    -전문(p. 170-1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