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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사(思無邪) 인용이냐, 표절이냐/ 박진환

검지 정숙자 2015. 12. 27. 22:16

 

 

   『한국문학인』2015-겨울호 <권두언/ 이 계절의 언어>

 

   

    사무사(思無邪) 인용이냐, 표절이냐

 

    박진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라도 울렸더라면 행복한 한 해였을 것을 nobel상 소식 no bell로 울리지 않았으니 남은 것은 그 반대쪽의 것들로 한 해가 마무리될 듯싶다.

  정치 현실이 그러하고, 경제 현실, 그리고 시대적 부조리나 악행 등이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싶다. 어찌 문단이라고 다르겠는가. 그 중에서도 신경숙의 표절 시비는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로 제시될 수 있을 듯싶다.

  표절 시비란 보는 관점이나 각도나, 시각 · 해석에 따라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를지 시비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신경숙의 표절 시비도 '표절이다', '아니다'를 놓고 시비가 그치지 않았다. 옛 분들은 이를 지적해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분명하지 않다는 뜻으로 숙시숙비(熟是熟非)란 말을 즐겨 쓰기도 했다.

 

  표절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불테르의 표절 항의에 대한 재치있는 응수다. 볼테르의 비극을 관람한 작가였던 필그란은 자기의 시가 너무 많이 표절당했다고 생각하곤, "당신 같은 재주 많으신 분이 어찌 남의 재산에 손을 댈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 그랬더니 볼테르 왈, 그 특유의 촌절살인과 같은 해학미 넘치는 재담으로, "아 그랬던가요, 내가 당신의 작품을 표절했나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 연극은 상상 외로 실패했단 말입니다."라고 응수했다는 표절 시비에 얽힌 한 토막 일화다.

 

  표절이란 시나 글을 짓는 데 있어서 남의 작품 내용의 일부를 몰래 따다 씀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표절작가에게 붙여진 것이 '글도둑', '글 훔치기' 등의 불명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심지어는 표적(剽賊)이라는 악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표절과 비슷한 것에 인용(引用)이란 것이 있다. 남의 말이나 글, 또는 사례 가운데서 한 부분을 참고로 이끌어다 쓰거나 따다 씀을 일컫는 말인데 따온 글을 인용문, 따옴표를 인용부, 따다 쓰는 법을 인용법이라 부르기도 한다.

  표절과 인용이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것은 표절이 '몰래 따다 쓴 것'과 달리 인용은 '따다 씀을 밝히고 있다'는 차이 때문이다. 논문에서 남의 글을 갖다 쓰고도 표적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 글의 출처나 내용, 저자나 필자 등을 주(註)로 낱낱이 밝힘으로써 '몰래 따다 쓰는' 표적을 면책받기 때문이다. 신경숙의 경우 표절과 인용 중 그 어느 것의 하나에 해당됐기 때문에 시비가 일었던 것이고, 책임과 면책은 문학적 양심과 독자적 양심에 의해 옳고 그름이 판가름날 것으로 여겨진다.

 

   이쯤에서 공자의 사무사(思無邪)가 표절이냐 인용이냐에 대한 시비 아닌 사실에의 접근을 제시하고 싶다. 대부분의 경우 사무사 하면 공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왔고, 또 그렇게 배우기도 했다. 그 소의인 즉 논어에, "자왈 시삼백 일언이폐지왈 사무사(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라고 쓰인 전거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이 말은 당시 전해 오던 3천여 편의 시 가운데서 3백여 편을 골라 엮은 『시경(詩經)』을 평하는 말로 쓰여젔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다.

 

  문제는 이 주지하는 바와는 달리 사무사가 공자의 창작용어가 아닌 인용어였다는 점이다. 『시경』 노송(魯頌) 경편(駉篇)에 "사무사 사마사조(思無邪 思馬斯徂)"란 마음에 사사로움이 없으니 말을 생각함에 이에 미치는구나 하는 뜻으로 풀이되는 시구가 있다. 자왈(子曰)로 이해되어 왔던 사무사는 바로 이 시구에서 인용됐다는 사실이다.

  이 시구의 배경에는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희공이 말 농장을 백성들의 논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조성했는데, 이는 농민들에게 행여 피해를 끼칠까를 고려해서였고, 이를 덕정(德政)으로 보았던 백성들의 칭송이 사무사 사마사조란 시구로 불려졌다는 이야기다. 풀이나 이야기야 어찌 됐건, 문제는 요즘 해석으로는 사무사가 표절이냐 인용이냐로 시비 아닌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공자가 교과서격이었던 시경을 가르치면서 사무사를 자신의 말로 가르쳤는지, 노송의 인용이라 밝혔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때문에 숙시숙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는 하나 작금의 잦은 한국 문단의 표절 시비를 일깨우기 위해 한 토막의 삽화(揷話)로 제시해 본 사무사는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다.

 

  예술은 창조가 생명이고 문학 또한 창작이 생명이다. 이 평범한 이치는 표절이 예술에의 반역이자 스스로의 자살행위라는 점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일찍이 괴테는 "요즘 작가들은 잉크에 너무 많은 물을 타 쓴다"고 피력한 바 있다. 문학은 피로 쓰는 기록이다. 그래서 한 편의 창작은 작가의 분신이 되고 생명 자체가 된다. 피는 고사하고 잉크에 물을 타 쓰고서야 어찌 창작이라 하겠는가. 피로 쓰고도 못 면하는 부끄러움이 창작행위다. 하물며 남의 글을 훔쳐 쓰는 표절이 어찌 문학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설의를 필자 자신에게는 물론 한국 문학인에게도 던져 보면서 '예술은 표절이든가, 혁명이든가 둘 중의 하나'란 명언도 차제에 제시해 보고 싶다.

 

 

  * 박진환/ 1960년 《동아일보》신춘문예(시) 당선, 1963년 『자유문학』(평론) 등단. 저서 『21C 시학과 시법』『諷詩調 詩學』등. 한국펜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