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만 권을 갉아먹은 책벌레, 허균/ 조해훈

검지 정숙자 2016. 4. 15. 23:38

 

 

<조선시대의 冊人>

 

 

    만 권을 갉아먹은 책 벌레, 허균

 

    조해훈

 

 

  교산 허균(1569~1618)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조선과 동아시아의 격변기를 살다 간 인물로 여러 면보를 가졌다. 본고에서는 그 가운데 독서광으로서의 허균, 책 수집광으로서의 허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정치가로서의 허균은 허다한 추문 속에서 살다 반역죄로 50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문학가로서의 허균은 조선 문학사의 보배로은 존재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양은 허균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문장은 남이 따를 수 없이 한 시대에 뛰어났으나 사람이 경박하고 조심스럽지 못하다." 이처럼 허균과 동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허균의 사람됨은 좋게 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와 문장만큼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책광(冊狂)으로 허균을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서음(書淫 : 글 읽기를 지나치게 즐기는 사람)이라 지칭하면서 수집벽을 가진 독서광의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평생 책을 모으고 읽고 초록하고 저술하면서 책과 함께 산 사람이었다. 그러한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보자. 허균이 한강 정구가 책을 빌려간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돌려주지 않자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진지하여 비장미가 있다.

  허균은 "옛말에 '빌려간 책은 언제나 늦게 돌려주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늦다'함은 한 해나 두 해를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사강(史綱)』을 빌려드린 지 십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이제 그만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마음을 접고 강릉으로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려 합니다. 어렵게 말씀드립니다."라고 썼다. 편지에서 허균의 장서가와 독서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 일반인들이 허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내용 중 하나로 그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4천여 권의 책을 사온 이야기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허균은 1597년(29세), 1614년(46세), 1615년(47세) 세 차례 명나라에 갔다 왔다. 그 중 1614년과 1615년 두 해에 걸쳐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학해(學海)』와『임거만록(林居漫錄)』등 4천여 권의 책을 구입하여 국내로 가져왔다. 말이 4천여 권이지, 상상을 해보라. 지금의 책보다 부피가 큰 전적을 당시에 비행기나 기차, 자동차도 없는 시기에 그 먼 북경에서 가져온다는 것 자체도 경이로울 뿐이다. 말에 나눠 실었다면 도대체 몇 마리의 말에 실었을까? 그건 그렇고, 책의 구입비는 어디에서 났을까? 이 부분이 명확하지 않다.『광해군일기』7년 윤 8월 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다. 허균의 두 번째 사행 때다.

  "이번 사행에 임금이 은 1만 냥을 주었는데, 민형남이 큰돈을 역관에게 맡길 수 없다고 해, 정사 · 부사와 서장관의 방에 나누어 두자고 제안했다. 어느 날 밤 허균이 '은을 도둑맞았다'하면서 텅 빈 돈궤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니 일행이 깜짝 놀랐다."

  여기서의 은은 요즘 말로 하자면 비즈니스를 위해 중국 조정에 뿌릴 자금이었는데, 그 큰돈을 도둑맞은 것이다. 그런데 허균이 후에 책값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그가 편집한 『한정록(閑情錄)』의 범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갑인(1614) · 을묘(1615) 양년에 일이 있어 두 차례 북경에 갔다. 그때 집에 있는 돈으로 약 4천 권의 책을 구입했다."

  부산대 강병관 교수는 '집에 있는 돈'이라는 부분에서 묘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자기 돈으로 책을 샀으면 그만이지, 하필이면 '집에 있는 돈'이라고 굳이 출처를 밝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돈은 아마 훔친 돈이었을 것이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에 대한 변명으로 집에 있는 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 게다." 이 추측이 맞다면 과연 범부와는 다른 허균다운 행동이다. 허균의 <호서장서각기> (『성소부부고』권6)에 보면 허균이 후일 강릉부사를 지낸 유인길에게서 명삼(明蔘)을 얻어서 서울로 돌아왔는데, 마침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그 돈으로 책을 사왔다고 기록돼 있다. 판단은 독자들이 할 일이다. 

  자, 그러면 이제 그 책들의 행방을 알아보자. 그것들은 어떤 종류의 책이고,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1614년 봄에 서장관으로 허균과 함께 북경에 갔던 김중청이 자신의 문집에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내용이 길고 복잡하여 요약하자면 이런 말이다. 허균이 명 말기의 사상가인 이탁오의 역사비평서 『장서』를 구해 신기한 글이라며 보여주는데, 맹자와 주이, 주정과 부자를 마음대로 낮추는 등 자신의 반유가적 의식으로 기존의 역사를 뒤집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 뒤 『경서실용편』이란 책을 보니 이탁오가 세상을 속인 죄를 따져 묻고 그의 책을 모두 불태워버렸으며, 그를 복주시켰다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탁오는 공자의 비평, 곧 유가적 역사관의 기원을 비판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허균이 책으로 만났던 것이다.

  혀균은 당시 조선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책 100종 가량을 소개한 『한정록』을 편집하였는데, 여기에 1614년에 그가 보고 흥분했던 이탁오의 다른 저작인 『분서(焚書』가 인용돼 있다. 이탁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책 역시 『분서』였지 않은가. 허균이 인용하고 있는 『분서』는 오종선이란 사람이 엮은 『소창청기』에 실린 내용을 재인용한 것으로, 허균이 『분서』원본을 본 것은 아니었다. 허균의 글에서 이탁오와 관련한 내용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탁오가 허균의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혁명가 허균의 사상적 연원을 그에게서 찾기도 한다. 그리하여 새 세상을 꿈꾸었던 『홍길동전』과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역모사건을 함께 엮어 허균을 민중혁명을 꿈꾼 혁명가로 탄생시킨다. 『한정록』은 허균이 수입한 서적의 종류와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인데,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자, 그럼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에 더 접근해보기로 하자. 허균이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일까?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 서적을 들여왔다고 밝히고 있다. 박지원도 『연암집』에서 "게12장이 있는데 허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그것을 얻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서교가 동쪽으로 온 것은 아마 허균으로부터 주창된 것이다." 그렇다면 허균은 어떻게 이런 서적을 가져왔을까? 당시 명나라에는 마테오리치가 1606년 북경에 최초로 세운 성당이 있었다. 허균이 1615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게12장 천주교 찬송가를 가지고 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허균은 3번 유배를 가고, 6번 파직을 당하면서도 손에서 경전을 놓지 않을 만큼 불교를 신봉했다고 한다. 그는 불교로 인해 시련을 겪게 되는데, 수안 군수에서 파직되고 1607년 삼척 부사로 임명됐지만 탄핵을 받고 얼마 있다 벼슬에서 쫓겨났다. 관아에 불상을 모시고 불경을 외며 제를 올리는 등 승려와 다름없이 행동했다는 이유였다.

  허균이 천주교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아쉽게도 알 수가 없다. 다만 허균이 게12장을 들여왔다는 사실은 그가 조선의 성리학 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개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말이 약간 옆으로 샌 듯하지만 다시 허균이 수입했던 책으로 돌아가 보자. 4천 권의 책은 어디로 갔을까? 허균은 1617년 죽음을 직감한다. 그래서 자신의 문집을 정리하여 사위인 이사성에게 보내게 되는데, 그런 연유로 허균의 문집이 세상에 남게 된 것이다. 

  그건 그렇고 허균의 책은 어떻게 되었을까? 책의 행방이 나타났다. 사위 이사성의 아들인 이필진(그러니까 허균에게는 외손자)의 묘비명에 "수천 권의 서책을 집에 간직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허씨의 책"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허균의 그 많은 책이 외손가로 전해졌던 것으로, 그의 책과 관련한 기록은 여기까지이다.

  주지하다시피 허균 집안은 대대로 문재가 뛰어나 강릉지역에서는 허균의 부친 허엽과 형제들을 '허씨오문장(許氏五文章)'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기록한 <성옹지소록(하)>에는 허봉이 소장했던 책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어 둘째 형 허봉이 죽자 그의 장서를 허균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허균은 외가 쪽에서 서재의 형식으로 경영했던 강릉의 반곡서원에 소장된 1천여 권의 책과도 관련이 있다. 여하튼 그의 장서 중에서 가장 방대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역시 그가 중국에서 구매해온 4천여 권의 책이다. 그는 구입해온 서적으로 꾸준히 독서를 하는 한편 그것을 정리하여 『한정록』을 엮어냈다. 그의 문집에 들어있는 장서의 수만 해도 상당한 분량인데, 허균은 그것을 열심히 읽고 메모하고 선집으로 편찬해내는 자료로 이용한 것이다. 그 자신이 이미 '서음'으로 지칭하면서, "만 권 책 속의 한 마리 좀벌레가 되고 싶다"고 자신이 쓴  <호서장서각기>에서 피력할 정도였다.

  그러면 허균이 『한정록』을 엮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고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들의 삶과 인생관을 살펴보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그들을 본받아 자신의 삶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책은 허균의 여러 편저 가운데 가장 뒤늦게 엮어진 것으로, 그가 처형당하기 한 해 전에 마무리 되었다.

  1606년 허균이 38세 때 원접사 유근의 종사관이 되어 사신으로 온 주지번과 양유년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주지번은 문장에 능한 허균에게 감탄하였다. 또한 주지번을 통해 허난설헌의 시와 손곡 이달의 시, 그리고 조선의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중국으로 전하기도 했다. 주지번이 이별의 선물로 허균에게 4종의 책을 선물하였다. 하지만 허균은 1610년 43세 때 병으로 한가하게 지내던 중 이 책들을 다시 꺼내보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허균은 이들 책에서 그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정서를 발견하였고, 마음을 울리는 조목들을 가려내어 책으로 엮고 『한정록』이라 이름 붙였다. 지금 우리가 보는 『한정록』의 서문은 이때 지은 것이다. '한정'이란 '여유롭고 자적한 정취'를 말한다. 이 '한정'은 생활 속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것을 말할 뿐 아니라, 혼탁한 세상과 거리를 두는 삶으로서 보다 근원적으로 유유자적한 경지를 의미하고 있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허균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아닌 고인의 글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인용된 중국 서적들 중에서 유사한 내용의 글만 선별하여 20부문으로 나누어 선집하고 있다. 하지만 고인의 글만을 선집하여 묶은 허균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허균은 그 당시 자신의 지향점을 『한정록』을 통해 밝혔던 것이다.

  이 책의 인용서적 『암서유사』에서는 독서의 즐거움과 독서의 효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독서에서는 요점 파악이 중요함을, 들어보지 못한 견문을 넓히는 것도, 노년의 벗이 될 수 있는 것도 독서라고 언급한 부분을 수록한 것으로 볼 때 독서의 방법과 독서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장자전서』에서 장횡거의 입을 통해  "책은 마음을 지켜준다. 잠시라도 그것을 놓으면 그만큼 덕성이 풀어진다."라고 하면서, 독서의 효용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안지추의 입을 빌려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재물 1천만 냥을 쌓아도 작은 기예 한 가지를 몸에 지니는 것만 못하고, 기예 가운데 쉽게 익힐 수 있고 또 귀한 것은 독서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면식이 많기를 바라고 일을 널리 보려고 하면서도 독서는 하려 하지 않으니, 이는 배부르기를 구하면서 밥 짓기를 게을리하는 것과 같고, 따뜻하기를 바라면서 옷 만들기를 나태하게 하는 것과 같다."

  새겨들으면 보약보다 나은 안지추의 말을 하나 더 들어보자.

  "독서란 비록 크게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한 가지 기예는 되는 것이라 스스로 살아가는 바탕이 된다. 부모와 형제는 항상 의지할 수 없고, 나라도 항상 보호해 주지 않는다. 일단 혼자 떨어지게 되면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서 구하여야 한다."

  많은 재물은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서는 자신의 삶에 바탕이 되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안지추의 말을 통해 허균은 사람들에게 책을 읽지 않으면서 배부르기를, 따뜻하기를 바라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또한 이 글에서는 부모와 형제도, 나라와 고향도 항상 보호해 줄 수 없기에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 길의 바탕이 되는 것이 독서임을, 책 읽는 습관을 들여 자신의 삶의 바탕을 다져나갈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허균은 『안씨가훈(顔氏家訓』에서  "독서는 스스로 살아가는 바탕"이 됨을 언급하는데, 이는 독서의 필요성을 간절하게 말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서는 삶을 윤택하게 하는 발판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책 속에 다 있기에 독서하는 습관을 들일 것을 당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독서의 고수인 허균의 책 읽기 경험에서 나온 말이므로, 지금의 우리가 들어도 유익하다.

  실제로 허균이 혁명을 꿈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조선시대 최고의 책인이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쓰고 능지처참  되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

   *백년어(百年魚)』 2016-3. (제25호)

   * 조해훈/ 영남대 사학과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부산대에서 고고학 전공. 신라대에서 한문학(고전인문학) 전공으로 각각 박사과정을 마쳤다. 지은 책으로는 『 필사본 『화랑세기』를 통해 본 풍월주의 세계』,『조해훈의 발굴유적 순례』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조선시대 독서론 소고」,「18세기 한시에 나타난 경주 사마소의 성격」등이 있다. 동아대 석당학술원에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