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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은밀한 생』(발췌)/ 송의경 옮김

검지 정숙자 2015. 11. 1. 00:18

 

 

   『은밀한 생』파스칼 키냐르 _ (발췌)

 

      송의경 옮김

 

 

  제3장 소리 없는 피아노(부분)

  아름다운 텍스트는 발음되기도 전에 들린다. 그것이 문학이다. 아름다운 악보는 연주되기도 전에 들린다. 그것이 미리 준비된 서양 음악의 찬란함이다. 음악의 원천은 소리의 생산에 있지 않다. 그것은 듣기라는 절대 행위 안에 있다. 창조 행위에서 이 절대 행위는 소리의 생산에 선행한다. 작곡이라는 행위가 이미 그것을 듣고, 그것으로 작곡을 한다. 연주가 이미 들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듣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솟아오르게 한다. 그것은 의미하기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드러내기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듣기이다. (p.60~61)

 

 

  제4장 사틀레라는 이름에 대하여

  비발디*라는 이름은, 비록 그 이름이 예전에는 음악가들에게 유명했다 할지라도, 이 작곡가 생존 당시에는 경멸을 받았다. 그 때문에 이 노인은 비탄에 잠겼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그가 이전에 작곡한 그리고 두말할 여지 없이 몹시 아름다운 작품들에 쏟아진 멸시 앞에서 그가 느꼈을 쓰라림 이상으로, 그에게는 그로 인한 금전상의 현실적인 어려움, 곤궁, 이런 것들이 그의 말년을 어둡게 했다.

  그는 체념하고 하숙집에 방 하나를 얻어야 했다. 하숙집 주인의 이름은 사틀레였다.

  안토니오 비발디는 1741년 7월 말, 빈에 있는 포르트 카렌 시 근처인 사틀레 씨의 집에서 죽었고, 극빈자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는 기껏해야 빈자들을 위한 조종 소리를 요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작은 종소리 Kleingelaut.

 

   *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 이탈리아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베네치아 출생. 1703년 사제가 되었으나 지병 때문에 미사를 진행할 수 없었던 관계로 음악에 전념하였다. 1738년에는 암스테르담의 왕립 극장 백년제의 음악 감독을 맡는 등 명예와 성공을 얻은 반면에, 성직자답지 않은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평판이 떨어져 1940년 갑자기 고향을 떠나 다음해 7월 빈에서 객사하였다. (p.70)

 

 

  제18장

  연극의 세 천재는 아테네의 아이스킬로스*, 런던의 셰익스피어, 교토의 제아미다.

  제아미 모토키요*,는 15세기 초엽 사랑에 적합한 악기를 고안해냈다.

  가죽이 아니라 비단으로 씌운 북이다.

  그것은 침묵의 악기다.

  그 북은 교토 황궁의 뜰에 있는 월계수 고목의 가지에 매달려 있다.

  세월이 흘러 나무는 거대해졌다. 월계수는 호숫가에 심어져 있었다.

  공주가 단언하기를, 만일 누군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북을 살짝만 두드려도 천으로부터 소리가 생겨나, 퍼져서 규방에까지 크게 울릴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 공주는 사랑하는 님에게 몸을 맡기러 호숫가로 달려갈 것이다.

  정원사가 손으로 천을 두드려보나 허사여서, 가장 깊은 침묵만을 끌어냈을 뿐이다.

  그는 호수 표면에 비치는 북 그림자 속으로 서슴없이 몸을 던진다.

  호수가 그를 집어삼킨다.

  그 위로 침묵이 감돈다.

  호수 표면에 마지막 잔물결까지도 지워버린다. 그러자 차츰차츰 북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북소리가 공주의 귀에 닿자 그녀는 달려나가 자신의 옷을 찢고, 미친 듯이 익사자를 욕망하며, 이번에는 자신이 북을 울려 죽은 자를 불러내려 한다.

 

  *이스킬로스Aeschylos (B.C. 525~456): 고대 그리스, 아티카의 대비극시인. 아테네 융성기에 활약했으며, 장대한 종교적 작품을 썼다.

  제아미 모토키요(世阿彌完淸, 363?~1443): 일본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일본 연극 노(能)의 배우 겸 작가. 노의 상연 때 불리는 음악인 요코쿠 100여 편과 10여 편의 예술론을 남겼다. (p.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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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편소설 『은밀한 생』/ 초판 1쇄 발행 2001.7.12. 초판 14쇄 발행 2015.3.16. <(주)문학과지성사>펴냄

  *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 1948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베르뇌유쉬르아브르(와르)에서 태어나 1969년에 첫 작품 『말 더듬는 존재』를 출간했다. 어린 시절 심하게 앓았던 두 차례의 자페증과 68혁명의 열기, 실존주의-구조주의의 물결 속에서 엠마뉘엘 레비나스-폴 리쾨르와 함께한 철학공부, 벵센 대학과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강의 활동, 그리고 20여 년 가까이 계속된 갈리마르 출판사와의 인연 등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독특하고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18개월 동안 죽음에 가까운 병마와 싸우면서 저술한 『떠도는 그림자들』로 2002년 공쿠르 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대표작으로 『은밀한 생』『로마의 테라스』『퓌르템베르크의 살롱』『상보르의 계단』『세상의 모든 아침』『음악 혐오』『섹스와 공포』『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소론집』『옛날에 대하여』『심연들』등이 있다.

  * 심의경/ 서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대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화여대와 덕성여대에 출강했다. 키냐르의 작품 『은밀한 생』『로마의 테라스』『혀끝에서 맴도는 이름』『떠도는 그림자들』『섹스와 공포』『옛날에 대하여』와 그 외에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사랑, 소설같은 이야기』『달을 따는 이야기』『슬픈 아이의 딸』『당신도 나도 아닌』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조혁준 : 표지 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