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김추인_기행산문집『그러니까 사막이다』 「머나먼 나의 스와니, 아, 아프리카」

검지 정숙자 2024. 5. 20. 00:17

 

    머나먼 나의 스와니, 아, 아프리카

 

     김추인

 

 

  또 떠날 것을 꿈꾼다. 미답의 낯선 땅을 꿈꾼다.

  역마살 탓일 게다. 지리산 가시내는 늘 진화해야 한다는 강박감과 함께 내가 누구인가를 파고들었었다. 우리는 모두 한정판이므로 자기답게 살아야 마땅하므로··· 이런 자의식과 역마살이 나를 시인으로 세상을 떠돌게 하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언제였을까. 인사동 전시관에서 만난 '붉은 나미브'의 사진! 그 모래톱들은 오래 부동으로 나를 세워  놓았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저 붉은 모래의 나라를 가야 한다고 내 안의 여자에게 속삭였다. 그러고도 10년이 훌쩍 가버리는 동안, 神이 내 그리움을 엿보셨는가, 그 꿈이 실현되게 생겼으니···

  문득 정초의 꿈이 선명하게 온다. 밤하늘 백조자리가 은빛 날갯짓으로 날아오르던 그 새벽 꿈!

  그렇게 나는 아프리카행을 단행했던 것이다.

 

  사막이다. 듬성듬성 가시덤불 앉은 건기의 땅에 흙먼지가 날아오른다. 포식지와 피식자가 목숨을 담보한 채 사력으로 달린다.

  "치타, 단 30초야. 그 안에 가젤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배고픈 네 새끼는 죽는 거야. 잡아, 잡아."

  내가 다리를 움찔거리며 다급해 하는 사이 치타는 가젤의 뒷다릴 걸어 넘어뜨렸고 목을 밟고 선 채 승자의 표정으로 나를 돌아본다.

  "오 해냈어 치타, 사랑해. 네 날렵한 몸매의 그 속도는 누구에게도 추종을 허락하지 않았지. 언제 봐도 슬픈 네 눈물선은. 내게 연민을 넘어 널 오래 그리워하게 했었지 아마."

  사바나 속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날마다 치러지고 있다. 이 세계는 더없이 잔혹하지만 인간세계와 달리 그들에겐 악의가 없는 것이다. 

  치타가 가젤을 물고 큰 가시나무로 올라가 걸쳐둔 사이. 먼 데서 하이에나 소리가 들렸던가. 일순 긴장하는 기류. 하이에나 소리가 멎은 후에야 치타가 저음으로 끼욱    끼욱    새소리를 내자 가까운 덤불 속에서 새끼도 끼욱    끼욱    거리며 점무늬의 작은 얼굴을 내민다. 더 가까이 치타새끼를 보려고 덤불을 헤집는데 가시가 할퀴고 찌른다. "아 아야   ."

 

  "형님, 형님. 꿈꾸셨어요?" 올케가 잡아 흔들었다.

  "꿈? 치타새끼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맞아 난 지금 그 꿈꾸던 아프리카의 하늘을 날고 있는 거야' 문득 파노라마처럼 설레던 어제들이 보인다.

  취미라곤 여행이 전부인 올케가 내 사막여행 소식에 앞뒤 과정도 모른 채 자석처럼 철컥 딸려오며 따라 나서겠단다. 남동생 역시 "여행 마니아이신 누님과 함께라면 지옥엘 데려가도 안심입니다. 이 사람 유치찬란한 아이 같으니 누님이 잘 보관하셨다가 돌려주십시오."라며 현지에서 쓸 용채까지 두둑이 주는 것 아닌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터넷을 뒤져 아프리카 현지와 조인하고 12월, 눈싸락이 내릴 듯한 저녁 우린 케세이퍼시픽에 얹혀 정말로 날고 있었던 것이다. 낯선 사람들, 저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몇 번의 비행기를 갈아타고 수속하며 날고 있다. 달랑 둘이서 날짜를 잊기로 한다. 두고 온 일감들, 내 하늘정원의 꽃들, 식구들에 대한 미안함까지. 그런데도 밀려오는 불안감. 짧은 영어로 생면부지의 땅에서 잘 헤쳐갈 수 있을까. 부부가 현지 여행사를 한다는 황미연 씨가 케이프타운 공항에 나와 반겨주었다. 그동안 인터넷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많은 정보와 도움을 준 새댁이다. 뮤지컬 배우 박해미를 닮았다했더니 깜짝 반기며 "정말요. 감사해용." 예쁜 얼굴에 함박미소를 내건다.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타운 바닷가 작은 숙소에서 아침 물새소리에 눈을 떴는데 와    창 너머 전방에 불뚝 솟은 저것은 라이언 캣 봉우리. 새벽 텐트를 친 우람한 남성의 거시기를 보는 듯하다며 올케와 난 유쾌하게 낄낄거렸다. 사막여행의 우리가 여기 케이프타운까지 날아온 까닭은 사우스 아프리카 영사관에 들러 비자를 받기 위해서였다. 해서 케이프타운의 <마운틴 테이블>도 꼭 들르고 싶은 빈민마을 <타운쉽>도 잠깐 뒤로 미루자, 오매불망 나미비아가 기다리고 있으니. ▩ (p. 12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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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추인_배낭 기행산문집 『그러니까 사막이다』 2024.4. 9. <서정시학> 펴냄  

김추인/ 경남 함양 출생, 1986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모든 하루는 낯설다』『프렌치키스의 암호』『행성의 아이들』『오브제를 사랑한』『해일』『전갈의 땅』등